불기둥 치솟던 기억 떠올라 ‘몸서리’
“정부 보상 대책 미흡” 비대위 반발
한전 과실 여부 등 경찰수사 촉각
지난달 4일 새벽 미시령 자락에서 발화한 산불이 덮쳐 주택 24채가 순식간에 사라진 강원 속초시 장천마을. 불지옥과 다름 없었던 화염이 할퀴고 지나간 지 정확히 한달 만인 4일 악몽의 흔적이 하나, 둘 지워져 가고 있다.
지난달 25일 임시주택 견본이 장천마을 경로당 인근에 설치된 데 이어, 철거작업이 진행되는 등 이재민들의 새 보금자리를 짓기 위한 작업이 속도를 내고 있다. 자신의 일을 뒤로 한 채 전국에서 모인 자원봉사자와 대민지원에 나선 군 장병, 경찰들이 주민들에게 큰 힘이 돼 주고 있다.
동해지역에서도 산불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 15명을 위한 임시 조립주택 입주가 3일부터 시작됐다.
이재민들에게 제공하는 20㎡ 남짓한 조립식 견본주택은 거실과 주방, 화장실은 물론 폭염을 대비한 에어컨도 갖췄다. 주민들은 이곳을 1년 동안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다. 필요하면 1년간 더 쓸 수 있다.
◇”치솟던 불기둥 기억에 아직도 몸서리”
새 보금자리가 생길 것이란 기대도 잠시, 피해 주민들은 걱정이 앞선다.
삶의 터전을 잃었다는 허탈감, 고령의 나이에 재기할 수 있을까라는 자괴감이 여전히 이들을 괴롭힌다. 토사와 낙석을 막아줄 숲이 사라진 탓에 비라도 내리면 산사태 걱정에 뜬눈으로 밤을 지샌다.
시부모에게 물려 받은 집을 산불로 잃었다는 장천마을 주민은 “강풍 속에 솟구치는 불기둥을 피해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겼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유산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자신을 자책했다. 이웃 주민 김모(74ㆍ여)씨는 “50년 넘게 살던 집은 물론이고 농기구와 볍씨가 모두 사라져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걱정”이라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산불의 최초 발화지인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용촌리 주민들은 당시를 떠올리면 몸서리가 처진다. “폭탄이 터진 듯 거대한 불꽃이 함박눈처럼 쏟아지던 당시 기억 때문에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다”는 게 이들의 하소연이다.
◇”정부, 국민성금으로 생색”
지난 1일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정부, 청와대가 동해안 산불로 전파된 주택 복구비 3,000만원과 반파 1,500만원, 소상공인 지원 2,000만원 등 피해 보상ㆍ지원대책을 내놨으나,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주민들의 삶을 제자리로 돌리기엔 역부족이다.
일부 주민들은 여러 차례 눈물로 호소했음에도 정부가 야속하기까지 하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주택 복구비가 당초 1,300만원에서 정부 지원금 3,000만원을 합쳐 최대 6,300만원까지 확대됐다고는 하지만 부담이 크긴 마찬가지다. 주민들은 “우리가 불을 낸 것도 아닌데 빚더미에 올라 앉을 판”이라는 원망을 쏟아내고 있다.
장천마을 어두훈(61) 이장은 “시골이라고 해도 국민주택 규모로 집을 지으려면 건축비가 1억3,000만원은 족히 든다”며 “70~80대 어르신들은 이자도 감당하지 못해 자식들에게 빚만 지우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많다”고 전했다.
소상공인과 중소기업 지원 대책도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나려 해 보지만 현실은 여전히 가혹하다”는 푸념이 나오는 이유다.
급기야 고성 속초 산불 비상대책위는 지난 2일 속초시의회 앞에서 집회를 갖고 “국민들이 모아주신 성금을 마치 정부의 지원인 양 포장해 발표했다“며 당정청에 날을 세웠다.
비대위는 “창고와 재고물품, 공구가 모두 불에 타 살길이 막막한 중소상공인들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2~3차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질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정부가 먼저 피해주민들에게 실질적인 보상을 한 뒤 한전에 구상권을 청구할 것과 중소 상공인, 세입자를 위한 추가 대책을 요구했다. 이들은 상경집회도 불사하겠다고도 했다.
이 과정에서 강원도의 대응도 아쉽다는 지적이다.
정부에 후속조치를 요구하고 세밀한 복구계획을 내놓기는커녕, 당정청의 입장을 다시 전달하는 수준에 그쳤기 때문이다. 언제, 얼마를, 어떻게 피해주민들에게 지원할 것인지를 명확히 밝히지 않은 강원도는 지난 3일 공식 브피핑을 자청해 이번 산불 진화와 복구과정을 백서로 제작, 선례로 남기겠다는 의지는 분명히 했다. 앞 뒤가 바뀐 대응이 아닌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한전 책임 여부 수사 촉각
고성과 속초 일대 1,227㏊ 등 동해안 5개 지역에서 축구장 3,966개과 맞먹는 산림을 잿더미로 만들고 1,291억원에 달하는 피해를 낸 이번 산불의 원인 규명을 위한 수사도 관심이다.
전신주와 개폐기 관리 문제 등 한전의 업무상 과실 여부가 주민들의 피해보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 지난달 4일 오후 7시17분쯤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도로변 전신주에서 시작된 고성 산불은 전신주 고압전선이 바람에 떨어져 나가면서 발생한 ‘아크’가 발화 원인으로 지목됐다. 2006년 설치된 개폐기는 전신주에 달린 일종의 차단기로 한전이 관리하는 시설이다.
강원경찰청은 지난달 23일 한전 속초지사와 강릉지사 2곳을 압수수색 했다. 개폐기의 교체 주기와 유지, 보수 과정, 24시간 관리 시스템 등 한전 측의 업무상 과실이 있었는지를 파악하기 위함이다.
경찰은 이어 한전과 하도급 업체 관계자 10여명을 참고인 등으로 소환해 조사를 벌였다. 업무상 과실이 드러나면 참고인이 피의자로 전환할 방침이다. 수사는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다.
앞서 김종갑 한전 사장은 고성 산불 발생 20일 만인 지난달 24일 이재민들을 찾아 사죄의 뜻을 밝히고, 민사적인 책임도 지겠다고 약속했다.
한전은 지난 2일 산불이 발생한 지 한 달이 다 돼서야 강원도와 고성, 속초 피해주민 등이 참여하는 보상협의체 구성을 최문순 강원지사에 제안했다.
경찰은 또 산림 1,260㏊를 태운 강릉ㆍ동해 산불은 옥계면 신당에서 수거한 전기 시설 등에 대한 국과수 정밀 감정 결과를 토대로 실화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박은성 기자 esp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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