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10> 79년 만에 찾은 김법린의 연설문
프랑스 국립도서관(BnF)에 소장된 김법린 선생의 학적부.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장 제공

‘서울 안국동 40번지’(40 Ankookdong, Soeul, Coree).’

1923년 11월 6일 파리대학(현 소르본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한 김법린 선생의 학적부에는 인상적인 주소 한 줄이 남아 있다. ‘부모 또는 지도교사 거주지 주소’를 쓰는 칸에 가지런히 적힌 ‘안국동 40번지’, 바로 민족불교 수호의 상징인 선학원(禪學院)의 주소다. 경북 영천군에서 태어나 은해사에서 출가 후 부산 범어사로 거처를 옮겨 명정학교(현 금정중학교)에서 공부한 그가 이역만리에서 유학하던 시절. 자신의 고국 주소로 선학원을 지목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선학원은 은사 만해 한용운 선생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선종의 중앙 기관으로, 일제의 사찰령 발표 이후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한국 승단이 세속화돼 가는 것을 개탄해 한국 불교 법통 수호를 취지로 창설됐다.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장은 유럽 답사 당시 유학생 이승희씨의 도움으로 프랑스국립도서관(BnF)에 남아 있던 김법린 선생의 학적부를 찾았다. 조 소장은 “당시 선학원을 주소로 삼은 건, 선학원 설립을 제안했던 한용운 선생을 지도교사로 염두에 뒀기 때문 아니겠냐”라며 “이국에서도 스승이 안국동 40번지, 선학원에 있음을 상기했다는 사실은 그 기록만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실제 한용운 선생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김법린 선생이 3ㆍ1운동 참가, 중국에서 항일투쟁, 프랑스 유학 시절의 활동, 귀국 후 독립운동 등을 이어 온 행적을 추적하다 보면 불교계 인사들의 치열했던 독립운동의 숨결이 꾸준히 등장한다.

김법린 선생의 평전 ‘불법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한 불교인 김법린’(역사공간 발행) 등에 따르면, 한용운 선생과 처음 만난 때는 그가 1918년 불교계 최초 고등교육기관인 중앙학림에 입학하면서다. 당시 민중 의식계몽운동을 펼치던 한용운은 중앙학림에 출강하고 있었다. 1919년 2월 28일 밤에는 한용운 선생이 집으로 학생들을 불러 자신이 작성 기초위원으로 참석한 독립선언서를 나눠주며, 서울과 각지에 배포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 당부를 받은 학생들은 민족대표들이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올리던 순간, 시내에서 선언문을 뿌렸다. 시내 배포를 마친 김법린 선생은 경부선 열차를 타고 범어사로 향했다. 일제의 검문을 피하기 위해 부산역 대신 물금역을 택해 금정산 고당재를 넘어 우여곡절 끝에 범어사에 도착했다. 학교 등 교육기관과 포교당, 야학 등을 운영하던 범어사는 거사를 모의하기 좋은 장소였다.

서울에서 온 학생들과 범어사 스님들은 3월 18일 동래 장날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30명의 결사대도 조직했다. 준비 과정에서 일부 주동자가 체포되기도 했지만 만세 운동을 향한 열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윽고 18일 밤, 지방학림 승려들과 학생들은 군중과 함께 동래읍 서문 부근에서 동래시장까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전개했다. 사전에 등사된 독립선언서 5,000여 장과 대형 태극기 1개, 작은 태극기 1,000여개가 거리에 흩날렸다.

김법린 선생처럼 서울에서 3ㆍ1운동에 참여하고 지방으로 향해 시위를 주도했던 중앙학림 학생 중에는 검거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다행히 일제의 눈을 피해 귀경할 수 있었던 김법린 선생은 이후 동료들과 상하이로 밀항했다가 ‘각종 자료 수집’의 밀명을 띠고 국내로 잠입했다. 당시 임시정부가 국제연맹을 향해 일본 침략의 부당성, 잔혹성을 알리기 위한 사료집 편찬을 준비 중이었는데, 이를 위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기 위한 귀국이었다.

이들은 당시 관립외국어학교 부교관, 한성사범학교 교장 등을 지냈던 현채 선생의 집 다락방에 숨어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각종 자료를 수십일 간 베꼈다. 평안도 노동자 외양으로 위장한 이들은 이렇게 베껴 쓴 자료를 짊어지고 임시정부로 돌아왔다.

세계 정세를 바로 보고 설득할 힘을 키우기 위해 유학을 택했던 김법린 선생이 이후 박사학위 취득을 포기하고 귀국을 결정한 것도 자신을 키워준 불교계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였다. 1928년 2월 14일 범어사 귀국 강연을 시작으로 선생은 조선 불교 정체성 확립을 위해 애썼고, 1930년대 불교계 비밀결사인 만당에 참여한다. 범어사에서는 꾸준히 만당 동지인 허용호 선생 등 청년 승려들과 야외 수업을 하며 청년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매진했다. 그는 늘 “우리 민족은 반드시 독립할 수 있다”고 학생들을 독려했다.

조 소장은 “김법린 선생은 세계피압박민족대회 연설로 유럽인들에게 일제의 실체를 각인시킨 공으로 기억되지만, 동시에 불교에 헌신한 종교인이자 광복 후에는 교육자, 정치가의 명을 다했던 인물로 한국불교민족운동사에 간과할 수 없는 획을 그었다”고 설명했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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