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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명약이 탄생하는 풍경

입력
2019.05.04 04:4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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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저녁 무렵 회사 근처로 지인이 찾아왔다. 근처 된장찌개집 앞에서 기다릴 테니 얼른 나오라는 메시지가 떴다. 사전 약속도 없이 누군가 찾아오면 덜커덕 걱정이 앞선다. 다소 피로해 보이는 그를 데리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음식을 주문하자마자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응? 이거 먹으려고. 온종일 그리웠어. 내 영혼의 비타민 같은 음식.” 놀고 있네. 안도 섞인 콧방귀가 터졌다. 뒤이어 ‘비타민 어쩌고’ 하는 그의 말에 걸려 어떤 풍경이 스르르 떠올랐다.

어느 해인가 미국을 다녀온 친구가 종합비타민 한 통을 여행기념 선물이라며 주었다. 우리 나이 20대 중반이던 무렵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친구, 어린 나이에 배포도 컸다. 비타민 500정이 들어 있는 플라스틱 병이 대용량 샴푸 통만큼이나 우람했다. 아는 사람은 알 텐데, 미국에서 만드는 영양제는 한 알의 크기도 무식하게 크다. ‘유에스아메리카에 사는 인간들은 목구멍도 큰가 봐.’ 한 알을 삼키다 목에 걸려 혼쭐이 난 나는 구시렁거리며 그 통을 시골 엄마에게 가져다주었다. 하기야 종합비타민 같은 거 안 먹어도 ‘내 영혼의 비타민’은 천지사방에 넘쳐날 때였다.

얼마 후 고향에 간 나는 참으로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다. “대현이 엄마, 집에 있지유?” 아랫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명치끝을 주먹으로 치며 우리 집으로 들어섰다. 마중나간 엄마를 보자마자 그이가 계속했다. “나 미국 약 두 개만 줘 봐유. 하이고 참, 복장이 터져서…” 뭔 일인가 궁금하던 순간, 엄마가 얼른 물 한 잔과 종합비타민 통을 가져오더니 두 알을 꺼내서 내미는 게 아닌가? 방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내가 눈을 치뜨며 일어서는 찰나, 고등학교에 다니던 막내 동생이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내 팔을 잡아끌었다. “어허! 저기는 언니가 낄 자리가 아녀.” 태생적으로 겸손할 수밖에 없는 여러 조건을 타고난 나는, 나보다 여덟 살 어리지만 지능지수가 10쯤 높은 막내 동생에게 존경 비스름한 감정을 느껴온 터였다. 고분고분 도로 앉은 내게 그 애가 속삭였다. “요 며칠 지켜봤더니 언니가 우리 동네 어른들한테 아주 큰 선물을 했더라구. 지난주에 금이댁 아줌마가 머리가 부서질 듯 아프다고 오셨거든. 근데 말야, 저 비타민 두 알 먹고 한 시간쯤 엄마한테 신세타령을 늘어놓고선 두통이 싹 나았다며 평안한 얼굴로 가시는 거야. 엊저녁에는 아랫집 홍씨 할아버지가 술병으로 속이 쓰리다면서 미국 약 두 알 달라고 오셨지. 마루에 걸터앉아 한참을 흥얼거리시다 저녁밥까지 맛나게 자신 뒤 일어서면서 한 말씀 하던걸. 역시 미제 약이 신통하다고.” 말인즉, 종합비타민이 동네 어른들의 만병통치약 구실을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나저나 저렇듯 천연덕스럽게 장단을 맞추는 엄마가 나는 좀 밉살스러웠다. 눈 흘기는 나를 동생이 타일렀다. 저 양반들, 피차 다 알고 저러는 거라고. 그러니까 우리는 미제 약의 놀라운 효험이나 구경하자고. 역시나. 동생의 말이 맞았다. 비타민 두 알을 삼킨 아랫말 아주머니는 자리에 눌러앉은 채 배추씨 뿌리는 일을 두고 그 댁 바깥어른과 한바탕 부딪친 사연을 엄마에게 직접화법으로 죄다 털어놓고는 그제야 체증이 좀 내려간다며 서둘러 떠나갔다. 그 모양을 지켜보자니 신묘한 화타가 바로 여기 납셨구나 싶었다.

식사를 마친 지인과 나는 근처 카페로 갔다. 그가 이야기를 했다. 들어보니 오늘 그가 겪은 일은, 그리 심각하지 않은 직장생활의 해프닝이었다. 다만 이 일로 인해 하루 종일 그는 울적했던 것 같다. 올 때와 다르게 편안한 표정으로 일어서던 그가 말했다. “된장찌개 그리울 때 또 올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손을 흔들며 지하철 선유도역 안으로 사라졌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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