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일 정상회담 성사 땐 日 ‘한국 패싱’ 심화 우려… 文정부 ‘중재자론’도 축소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북일 정상회담의 조기 실현을 위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조건 없는’ 만남을 제의했다. 납치문제 해결을 위한 일본 정부의 이런 입장은 지난해 6월 1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일관된 흐름이지만, 이번엔 김 위원장을 “전략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지도자”라고 평가했다는 점에서 파격이다. 남북은 물론 북미 교착국면에서 북일 정상회담이 성사될 경우, 일본이 북미 간 중재자로 나설 수 있어 북핵 문제 해결과정에서 한국과 일본이 주도권 경쟁을 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아베 총리는 2일 산케이(産經)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조건을 붙이지 않고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 솔직하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납치문제와 관련해선 “국제사회와 연대하는 것과 동시에 일본이 주체적으로 대처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북일간 상호불신의 껍질을 깨기 위해선 내가 김 위원장과 직접 마주보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고 강조했다. 또 김 위원장에 대해 “국가에 무엇이 최선인지를 유연하고 전략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지도자라고 기대하고 있다”고 추켜세웠다.
아베 총리의 대북 유화 제스처는 그간 일방적이었다. 지난해 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잇달아 만나면서 ‘일본 패싱’ 비판에 직면하자 서둘러 대북 접촉을 추진했다. 몽골 등 제3국에서 물밑대화를 벌였으나 아직 북한으로부터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등 한반도 주변 상황에 따른 아베 총리의 대북 메시지 변화는 눈에 띄는 대목이다. 지난해 9월 유엔총회에서 북일 정상회담 의지를 밝히면서도 “납치문제 해결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1월 국회 시정연설에선 “북한의 핵, 미사일, 납치문제 해결을 위해 김 위원장과 마주해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과단성 있게 행동하겠다”고 했고, 이번에 또다시 “조건 없이 일단 만나자”고 북한에 공을 던진 것이다. 지난달 각의에 보고한 외교청서에서 ‘대북 압력’이란 표현을 삭제한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치 않다.
니시노 준야(西野純也) 게이오(慶應)대 교수는 “북한이 북미 교착국면 타개를 위해 지난달 러시아에 이어 일본과 만나려 할 수 있다”며 “2001년 미국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이후 미일관계가 급속히 악화했을 때도 북한은 대미관계 개선을 위해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총리의 평양 방문을 통해 일본을 활용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북한 입장에선 트럼프 대통령과 아베 총리와의 밀월관계는 일본을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셈이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북일 정상이 만나 향후 북일 국교 정상화로 이어질 경우 북한은 전후 보상금을 기대할 수 있다”면서도 “일본을 통해 당장 대북 제재가 풀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과의 관계에서 아베 총리를 활용하려는 정치적 요인이 더 클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일본은 3월 대북 독자제재를 2년 연장하는 등 비핵화 문제에선 ‘제재 유지’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아베 총리가 이날 인터뷰에서 비핵화나 제재해제 언급 없이 납치문제만을 거론한 것은 국내 정치를 의식한 것이란 해석도 있다. 납치 피해자 가족 다수가 고령인 상황에서 조속한 해결을 요구하고 있고, 올 7월 참의원 선거를 의식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 입장에선 파격 제안을 한 셈이어서 북한이 거부한다고 해도 정치적 리스크가 크지 않은 것도 이유다.
다만 북한이 아베 총리의 러브콜을 수용, 북일 관계가 급속히 가까워질 경우 한반도 운전자론과 적극적인 중재자론을 주장해 왔던 우리 정부의 입지가 축소될 수 있다. 악화하고 있는 한일관계에도 불똥이 튈 수 있다. 일본이 지난해 북한과 세 차례의 정상회담을 했던 한국 정부로부터 정보를 제공 받을 필요성이 줄어든다면, 그나마 유지해 온 양국 간 협력분야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이미 표면화한 일본 정부의 한국에 대한 ‘전략적 무시’ 현상이 더욱 심화할 수 있다. 다음달 28~29일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아직 한일 정상회담 일정을 잡지 못하는 상황이 방치될 수 있다는 얘기다. 요미우리(讀賣)신문은 이날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면 한국과의 회담에 응할 의미가 없다”는 총리관저의 냉담한 분위기를 전하고, 지난달 23일 한일 외교부 국장급 협의에서도 한국 측에 한일 정상회담이 개최되지 않을 가능성을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도쿄=김회경 특파원 herems@hankookilbo.com
안아람 기자 onesh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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