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난리 통에 독일 나치를 거쳐 스페인 미술관으로 넘어간 고가의 그림을 원래 소유자가 반환해달라고 한다면, 돌려줘야 할까. 스페인 현행법에 따르면, 정답은 ‘아니오’다. 박물관이나 예술품 수집가가 작품을 손에 넣었을 당시 해당 작품의 창작자가 불분명하다면, 창작자 허가 없이도 소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 BBC 방송은 1일(현지시간) 고가의 미술품을 둔 스페인 박물관과 원래 소유주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연방법원에서 벌인 소송에서 원래 소유주가 지난달 30일 패소했다고 보도했다.
문제의 그림은 프랑스 인상파 거장 카미유 피사로의 1897년작 ‘오후의 생토노레 거리, 비의 효과’로 약 3,000만 달러(349억원)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소송에서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선 이는 20세기 초 시아버지로부터 그림을 물려받았다고 주장하는 유대인 릴리 카시러다. 카시러는 2차 대전 발발 직전 독일을 탈출하려 했으나, 당시 나치는 통행 허가증을 내주는 대가로 이 그림을 요구했다. 하는 수 없이 카시러는 그림을 나치에 넘겼고, 이후 이 그림은 몇 차례 주인이 바뀐 뒤 독일 기업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였던 한스 하인리히 티센 보르네미사 남작 손으로 들어갔다. 보르네미사 남작은 이후 이 작품을 스페인에 매각했고, 그 결과 그림은 보르네미사 남작의 이름을 딴 스페인 마드리드의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이 그림이 스페인 미술관에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카시러는 2005년 미국 법원에 소송을 냈다. 2010년 카시러가 숨진 뒤부터는 카시러의 아들이 계속해서 소송을 이어왔으나 결국 패소하게 된 것이다.
재판부는 다만 이 그림의 스페인 미술관 소유를 인정하면서도 스페인 당국이 ‘워싱턴 합의’를 불이행한 점은 별도로 지적했다. 워싱턴 합의는 나치가 약탈한 예술품은 빼앗긴 사람의 상속자에게 반환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스페인 등 44개국이 1998년 서명했다. 법원은 “보르네미사가 이 그림을 사들였을 때 출처 표식이 없다는 점 등으로 미뤄 약탈당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스페인 미술관의 소유권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워싱턴 합의에 따른 반환을 권고한 셈이다.
홍윤지 인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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