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C’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공식 외교 행사장에 꼬깃꼬깃한 국기를 걸고, 상대국 이름을 잘못 부르고, 불러준 나라 대신 티격태격하는 옆 나라 말로 대통령이 인사하게 하고…. 요즘 망신과 결례를 초래한 외교부의 실수가 언론에 노출되는 일이 잦다. 무신경과 무성의로 인식될 법한 일들이다. ‘법보다 힘’인 국제 사회에서 의전(儀典)은 국가끼리 서로 존중심을 보이고 자존심을 지켜주게 하는 최소한의 예우 규범이다. 그것마저 무시되면 문명이 야만과 다르지 않다. 나사가 풀렸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이게 빌미가 돼 무분별한 ‘워라밸’(일과 생활의 균형)이 기강 해이를 불렀다는 식의 목소리가 커지는 건 퇴행이다. 걱정스럽다. 외교는 초월적 직역이 아니고 외교관도 노동자임은 물론이다. 외교가 밤낮이 없다고 외교관이 24시간 일할 수는 없다. 외교부가 배출한 첫 여성 지역국장이 과로로 쓰러진 게 불과 반년 전이다. 최근 잇달아 터져 나온 외교부 실책이 업무 과다에 따른 집중력 저하에도 기인한다면 정신력 강조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외교관 공급을 늘려야 한다.
희생이라는 미명은 시대착오적이다. 더 이상 보상을 명분으로 갈음할 수는 없다. 더욱이 외교관의 가치관을 헤집어놓는 게 국익이라는 명분이다. 개인과 달리 국가에게는 이익이 최우선이다. 자기 처신에 요구되는 도덕과 염결성을 정작 업무에 관여할 때는 배제해야 하는 경우가 외교관한테는 다반사다. 자국 이익을 위해서라면 기만도 불사해야 하는 게 어쩌면 외교다.
더러 지적되는 외교관의 특권의식이나 선민의식은 보상심리가 빗나간 결과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실제 외교관에게는 의무에 상응하는 권력도 부여된다. 주재국에서 대사ㆍ총영사는 대통령과 다름없다. 그들의 흔한 일탈이 갑(甲)질이다.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있는 데다 무역으로 먹고 사는 나라다 보니 늘 외교관은 특별 대우를 받는 엘리트일 수밖에 없었다. ‘힘을 빼놨더니 얼까지 빠졌다’는 비아냥이 일부 사실이라면 아마 상당 부분 특권 상실에 따른 보상 공백 때문일 것이다.
바야흐로 개인의 시대다. 국민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국가는 이제 퇴장할 때가 됐다. 무정부주의 성향의 일본인 노(老)작가 마루야마 겐지는 “국가라는 형태를 공기ㆍ물처럼 당연한 것으로 대하는 태도는 지양돼야 한다”고 일갈한다. 국가를 소유한 소수가 국민을 세뇌할 때 동원하는 대표적 명분이 민족주의를 내세운 애국 사상이고, 특징적 주장이 “국가가 있기에 국민도 있다”는 ‘국가우선론’이라는 것이다. 국가가 숭배할 만한 신도 아니거니와 배후가 있다는 간파다.
공교롭게도 근래 외교부를 향한 빈축의 중심에 태극기가 있다.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는 법까지 있는데도 구겨지거나 색이 흐릿하거나 거꾸로 매달리도록 정부가 방치했다는 공분이 솟고 연민이 흘렀다. 분명 마루야마 겐지의 국가론은 급진적이다. 국가가 제공하는 소속은 원치 않는 부유(浮遊)를 피하게 해준다. 구체적 상징물 덕에 곁에 있는 국가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물신화는 곤란하다. 교조화한 애국도 마찬가지다. 맹신은 순종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외교 노동은 전형적인 국가의 개인 착취다. 국민 보호가 핵심 영사 업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국민인 자신보다 국가가 우선이라는 신념은 국가관의 분열을 부를 가능성도 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얼마 전 신입 직원 환영식에서 “여러분이 매일 하게 되는 일들은 국익 증진이라는 추상적 개념에 앞서 국민에게 더 나은 삶을 드리기 위한 노력”이라고 했다. 일찍 퇴근하려고 일찍 출근하는 외교부 간부가 늘었다고 한다. 대기성 야근을 줄여보려는 솔선이다. 관건은 특권이 아니라 전문성이다. 더 나은 전문가로 외교관을 키우고 합당하게 보상해야 한다.
권경성 정치부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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