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많은 환경부 블랙리스트 공소장 보니
청와대 낙하산 인사 위해 온갖 수발 들어
그르치면 불똥, 영혼 갖기 어려운 신세
행정부처 출입을 할 당시인 2000년대 초엔 각 부처가 신문에 실린 관련 기사를 일일이 칼로 오려 보고용으로 스크랩을 했다. 공보실 직원들이 돌아가며 스크랩했을 터인데, 마침 초급 사무관이 ‘칼질’을 하며 하는 말이 등 뒤로 들려왔다. “이런 일하려 어려운 고시 공부를 했나”하는 한숨이다. 관련 기사를 찾고, 읽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언론을 익히게 될 것으로 짐작되나 큰 포부를 안고 갓 입부한 사무관은 성에 차지 않는 일에 짜증을 냈다.
15년 전 사무관의 한숨이 기자의 묻힌 기억에서 소환된 것은 깜냥도 되지 않고, 공공기관장이 되기 위한 노력도 엿보이지 않았던 청와대의 낙하산 인사를 어떻게든 밀어보려 했던 환경부 공무원의 ‘헌신’이 안쓰럽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다.
경력 실적 학력 등 자격 요건이 충족되지 않고, 자기소개서조차 심히 부실했던 이 인사를 위해 환경부 공무원은 필요한 자격 요건을 찾아 보완하는 것은 물론 자기소개서, 심지어 직무수행 계획서까지 대신 만들었다. 면접심사 대비를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이 인사의 요청에 7개 항목의 예상 질문과 답변을 제공했고, 이에 더해 임원추천위원회(임추위) 당연직 위원인 환경부 고위 간부는 면접심사 토의에서 이 인사를 위한 방어 발언으로 통과 분위기를 이끌었다고 한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 주역인 김은경 전 환경부장관, 신미숙 전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 공소장에 나온 내용이다.
산하 기관장 공모 절차에서 A부터 Z까지 환경부 공무원이 일일이 손을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낙하산 인사의 부족한 자질만큼이나 청와대 압력이 거셌던 탓으로 보인다. 애초 자격요건을 갖추지 못해 서류심사조차 통과하기 어렵다고 보고하자 청와대는 “최종 후보자가 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지원을 다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니 말이다. 이 정도면 지원이 아니라 낙하산 인사의 수족 노릇을 하라는 게 아니면 뭔가 싶다. 정권의 탄생을 위해 얼마나 대단한 기여를 한 인물이기에 이 정도까지라는 의문보다 허드렛일에 자조하던 그 사무관과 비슷한 연배일 이 환경부 공무원들의 당시 심경이 더 궁금하다. 집안 사람이라도 해주기 어려운 일에 “내가 이러려고 공무원 했나”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듯싶다. 정의와 공정을 부르짖는 이 정권에서도 공무원은 가슴 바깥에 영혼을 내놓고 다녀야 하는 것인가.
이제는 다르겠거니 했거나, 아니면 조그만 영혼이라도 담아 저항한 것인지 청와대 뜻에 부응하지 못했던 또 다른 환경부 공무원은 갖은 수모를 당하고 좌천의 ‘피’를 보고야 말았다. 조현옥 청와대 인사수석이 주재한 인사추천간담회에서 환경부 산하 기관 상임감사 자리에 추천된 언론인 출신 인사가 경력 미비로 7명을 추리는 면접심사 대상에도 끼지 못하자 큰 불똥이 환경부 공무원에게 떨어졌다. 임추위 위원인 환경부 고위 간부가 다른 임추위 위원들에게 분위기 조성을 하지 못한 탓이라는데, 청와대 낙하산 인사에 대한 부실 관리 후과는 매우 컸다. 후보자들을 전원 탈락시켜 공모를 와해한 것은 둘째 치고 이 사안을 관할한 환경부 운영지원과장은 사죄와 반성의 염을 담은 소명서를 청와대에 내야 했고, 신 전 비서관은 차관이 함께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들을 문전박대했다고 한다. 임추위 위원인 환경부 간부와 이 과장은 결국 인사 원칙이나 본인의 뜻과 무관하게 문책 인사로 밀려났다. 공모제 무력화 불법성은 차지하고, 이런 행태야말로 권력의 갑질이 아니고 무엇인가. 실정이 이 지경인데 인사수석은 자리보전을 하고 있다.
공공기관 낙하산 인사와 공모제 잡음이 터져 나온 게 환경부 일만은 아닌 지라 이 정권에서도 얼마나 많은 공무원이 영혼을 벗어뒀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 사태에서 보였듯이 ‘의무 없는’ 일을 해야 했던 공무원들이 메모와 일지 등으로 직권남용 피해 흔적을 두루 남겨두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권력의 속성은 바뀌지 않았는지 몰라도 세태가 변했다.
정진황 뉴스2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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