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미술계는 통한다, ‘영상, 설치, 여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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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미술계는 통한다, ‘영상, 설치, 여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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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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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정강자, 강국진, 정찬승 작가가 진행한 해프닝 '한강변의 타살'의 한 장면.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제공

1967년 ‘한국청년작가연립전’ 전시장. 한편에 사람 형상을 한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맨 위엔 TV 안테나를 눈에 꽂은 마스크가, 아래는 세 쌍의 브래지어 형틀이 붙은 상자였다. 작가 심선희의 설치 작품인 ‘미니2’. TV 등 대중매체에 함몰된 심 작가 본인의 모습과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가치를 비판적으로 표현한 작품이었다. 화단의 소수인 여성 미술가가 회화나 조각이 아닌 설치작을 내놓는다는 것은 당시엔 파격적인 장면이었다.

1968년 작가 정강자가 동료 강국진, 정찬승과 함께 제2한강교 밑에서 ‘한강변의 타살’이라고 이름 붙인 퍼포먼스를 벌였을 때도 반응은 비슷했다. 이들은 직접 쓴 ‘문화고발장’을 삽으로 판 구덩이에 넣고 태웠다. 기성문화를 비판하는 내용이었으나, 관객들은 그다지 호응하지 않았다. “여자가 옷을 벗는다고 해서 왔더니 옷 벗는 여자도 없고 춥기만 하다”는 불평이 쏟아졌다. 예술로서의 퍼포먼스는 물론이고 여성 예술가에 대한 이해도가 그 만큼 낮은 시대였다.

심선희 작가가 1967년 한국청년작가연립전에 출품한 설치작 '미니2'. 한국일보 자료사진

50년 만에 한국 현대미술의 판이 확 바뀌었다. 국내외가 주목하는 각종 전시마다 설치와 영상, 퍼포먼스가 등장해 대세 장르의 자리를 굳히고 있고, 특히 여성 작가들이 이런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이 두드러지는 건 올해 들어서다. 이달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베니스 비엔날레 본 전시에 참여하는 한국 작가는 이불, 강서경, 아니카 이. 모두 설치ㆍ영상작가이고, 여성이다. 본 전시는 비엔날레 총감독이 세계 곳곳의 작가들을 엄선해 기획하는 전시로, 참여 작가 명단에 들었다는 것만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입증한다. 강 작가 등 3명이 세계미술계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한국정부가 베니스에 꾸리는 한국관 참여작가 3명도 모두 여성이다. 이들도 설치ㆍ영상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최근 발표한 ‘올해의 작가상’ 후보 4명을 관통하는 키워드 역시 영상, 설치, 여성이다.

이불 작가가 오는 5월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하는 '오마드V'의 모형. 비무장지대 감시초소에서 철거한 잔해물을 녹여 만든다. 홍윤기 인턴기자

한국에서 설치ㆍ영상 미술은 오랫동안 비주류 장르였다. 국내 시장이 미술품의 ‘수집, 전시기능’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고, 단색화 혹은 민중미술계가 이끄는 회화 중심으로 정체성을 정립해 왔기 때문이다. 설치ㆍ영상 작품은 대체로 규모가 크고 특정 공간과 전시의 맥락을 바탕으로 완성되기 때문에 수집 가치가 없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여러 오브제나 영상을 뒤섞는 제작 방식이 회화, 조각에 비해 예술적 논리성이 부족하다고 여겨진 측면도 있다.

변화의 기점은 ‘비디오아트의 대부’ 백남준의 ‘후예’들이 다수 양성된 1980년대 말이다. 당시 작가들의 관심사는 급격한 사회 변화였다. 이들은 당대를 반영하는 소재인 산업폐기물, 전자기기, 영상에 주목했다. 1987년 이불, 최정화, 홍성민 등이 속한 작가 그룹 ‘뮤지엄’이 창립전을 개최한 것을 비롯해 영상ㆍ설치 작품이 대거 등장했고, 영상ㆍ설치 작품의 ‘예술로서의 가치’가 재정립됐다.

강서경 작가의 '땅, 모래, 지류' 연작 중 한 작품. 국제갤러리 제공

이런 토양에서 성장한 작가들이 최근 해외에서 각광받는 것은 아시아 현대미술에 대한 세계 시장의 기대감이 한껏 커진 덕이다. 서양식 문법에 지친 세계 관객들은 한국 영상ㆍ설치 작가들이 쓰는 동양적 색채를 신선하게 받아들인다. 예컨대 강서경 작가의 작품은 멀리서 보면 현대적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재료나 제작 기법 등 한국적 디테일이 드러난다. 전통 돗자리인 화문석을 주 재료로 쓰거나, 궁중무용을 주요 모티프로 삼는 식이다.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에 참여하는 정은영 작가는 여성 배우들끼리 공연하는 한국적 창극인 ‘여성국극’을 주제로 영상 작품을 구성한다.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 참여하는 작가와 감독. 왼쪽부터 제인 진 카이젠 작가, 정은영 작가, 김현진 감독, 남화연 작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여성’이 미술계를 주도하는 현상은 세계적 트렌드와 맞닿아 있다. 지난해 전세계 문화계에서 ‘미투(#Metoo)’운동이 잇따른 것을 계기로 여성주의 다시 읽기 바람이 불고 여성 작가들이 재조명됐다.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 참여 작가 79명 가운데 여성은 42명(53%)으로 절반을 넘어섰다. 본전시 총감독 랄프 루고프는 특별히 의도한 일은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2년 전 본전시에 비해 여성 작가 비중이 20%포인트 가까이 증가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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