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검찰의 칼, 특수부 검사들
“제가 또 싸우자고 이러는 거 같습니까. 일단 대검 중수부로 보내주십시오. 검사라면 한 번 가봐야 안 되겠습니까? 적이 아니면 친구가 되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검사 역할을 맡은 배우 조승우가‘악의 축’인 신문사 주필을 향해 던진 대사다. 이 장면은개별 특별수사(특수)부 검사의 출세욕,그리고 재벌과 정치권 수사로 위기에 몰린 검찰 조직이 권력에 기생하려는 모습을 동시에 형상화한다. 비슷한 장면은 조승우가 또 다시 검사로 등장한 드라마 ‘비밀의 숲’ 등 수많은 영화, 드라마에서 반복된다.특수검사에 대한 ‘클리셰(영화에서 뻔하게 쓰이는 장치)’인 셈이다.
영화 ‘아수라’는 한 발 더 나간다. 특수부 검사로 분한 배우 곽도원은 장갑차 모양의 특수 차량을 타고 다닌다.재건축 지구에 비밀수사본부를 만들어 비리 경찰을 때리고,불법 도청으로 증거를 모은다.이런 것까지 클리셰라할 수 있을까.
‘아수라’ 이야기에 현직 특수부 A검사는 그저 호탕하게 웃을 뿐이었다. “특수 차량? 그런 거 진짜 한 번 타보는 게 소원이에요.경찰 때리는 건 워낙 말이 안되니 넘어간다 쳐도, 공개 소환을 해도 증거 들이밀기 전엔 입 다무는 게 특별수사인데 비밀수사본부로 피의자를 따로 부른다?영화지만 너무 영화스럽네요.”특별수사는 남 눈에 띄어선 안 된다.별도의 요란한 차량이나본부 따윈 없다.대형 사건 수사를 미끼로 승진 등을 거래했다는 이야기도 확인된 바는 없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무대포’는 이제 불가능하다.특별수사에 잔뼈가 굵은 한 검찰 간부는 “평검사 시절이던 20여년 전에야일단 체포영장 받아서 잡아다 두고 ‘인생의 중요한 결정은 30분 안에 해야 한다’고회유하고 설득도 했지만,지금은 그렇게 영장이 나올 리도 없고 변호사가 곧바로 따라붙기 때문에 그럴 기회도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무대포’ 대신 꺼내든 카드는 ‘집요함’이다.공안ㆍ형사 사건보다는 좀 더 광범위한 압수수색과 계좌추적이 가능하다는 점을 활용,폭넓은 정보를 취합해 분석한 뒤 피의자를 압박해나간다.2003년 참여정부 초기 불법 대선자금 수사 때 ‘띠지’ 사례는 특별수사계의 전설이다.압수수색을 해도 마땅치 않던 차에 B검사 눈에 지폐를 묶은 종이인 띠지가 보였다.띠지에선 띠지를 묶은 사람 이름이 나왔고,반경 5㎞ 내 은행을 다 뒤져 그 사람을 찾아냈다.거기서 출발해 비자금을 찾아냈다.
‘수표 속 메모’도 대표적 사례다.고위 공직자 비리 사건을 쫓던 C검사는 보름 동안 매달린 계좌추적이 신통치 않았다.추적 중이던 수표 몇 장을 뒤적대다 그 중 한 장 뒤에 적힌 네 자리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이 수표를 추적했더니 수표의 사용처인 주유소 직원으로부터 “네 자리 숫자는 수표를 쓴 사람의 차량번호”란 진술을 얻었다.그 차가 바로 고위공직자의 소유였다.이를 통해도 C검사는 자백을 얻어냈다.
그래서 특수부 검사의 하루는 빡빡하다.한번 대형 사건 수사가 시작되면 오전 9시 ‘당일 수사 예정 사항 보고’, 밤 10시 ‘수사 진행 상황 정리 회의’로 하루를 여닫는다.밤 10시 회의 이후엔 당연히 다음 날 수사 준비를 해야 한다.새벽까지 진술과 증거를 정리,분석하고 심문 사항까지 미리 챙긴다.잠시 옷 갈아입으러 집에 다녀오는 시간까지도 수사 생각만 할 수 밖에 없다.
특별수사 경력 10년이 넘은 D검사의 경우 ‘자문자답 카카오톡’을 활용한다.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요 수사 상황,추가 포인트,아이디어 같은 것들을 자기 카카오톡에다 보내놓는다. D검사가 슬쩍 보여준 이 기록을 보면 메시지 주요 입력 시간이 새벽 2~5시였다.누구누구 재소환, 무슨 보고서 확인,관련 기사 링크까지.집으로 오가거나 짬 날 때마다 수시로 적어둔다.D검사는 “대형 사건 수사를 하면 특수부 출신 전관 변호사에다 대형 로펌 변호사까지 동석한다”며 “검찰 수사의 미세한 변화까지 다 잡아내고,대규모 팀 단위로 자료를 면밀하게 분석하기 때문에 허점을 보이는 순간 바로 수사가 어그러진다”고 말했다.그래도 수사,기소,재판이 이어지는 건 “검사들이 더 집요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검찰수사받던 피의자들은 한결 같이 설렁탕을 먹는다.하지만 특별수사 현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짜장면이다. 현역 시절 ‘특수통’이라 불렸던 E변호사는 “희한하게도 검찰에만 오면 짜장면을 시켜달라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며 “치사하지만 일단 시켜준 뒤 먹기 전에 꼭 중요한 질문을 해 진술을 받아낼 때도 있다”고 귀띔했다. 겨울철엔 냉면도 의외로 인기란다.물론 짜장면이건 냉면이건간에 불기 전에 먹으려면, 다른 걸 먼저 불어야 한다.
정재호 기자 next8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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