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中 루리옌 초단, 이달 초 ‘제24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서 22대1 뚫고 본선 진출
日 나카무라 스미레 초단, 이달 초 9세로 입단…자국내 최연소 기록도 바꿔
韓 한상훈 초단, 2008년 ‘제12회 LG배세계기왕전’ 당시 예선부터 결승 진출…이후 실종
위축된 한국 바둑계 분위기 영향…불투명한 미래에 될성부른 새싹도 바둑입문 꺼려
2008년2월28일,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동관 3층 특별대국실. 국내외 바둑계 스포트라이트는 온통 ‘제12회 LG배세계기왕전’(우승상금 2억5,000만원) 결승 3국이 열린 이곳으로 몰렸다. 당시 최전성기에 들어선 이세돌(36) 9단과 돌풍의 주역인 한상훈(31) 2단이 1승1패의 상황에서 예정된 마지막 불꽃대결을 타전하기 위해서였다. 이세돌 9단은 그 해 국내와 국제기전에서 각각 4개의 우승컵을 싹쓸이, 세계 바둑계의 절대지존에 등극했다. 한상훈 2단에 대한 관심 역시 뜨거웠다. 초단으로 예선전부터 출발, 내로라한 선수들을 잇따라 물리치고 세계대회 첫 결승까지 안착한 대기록의 작성자였기 때문이다. 이 대회의 마지막 대국 직전까지 백돌로 전승한 한상훈 2단은 결승 3국에서 또한 백돌을 쥐면서 주변의 기대감도 높였다. 결국, 노련한 이세돌 9단의 반상(盤上) 운영에 우승컵은 내줬지만 초단 돌풍의 위력을 체감하기엔 충분했다.
바둑 초단의 별칭은 ‘수졸’(守拙)이다. 현란한 솜씨를 부리기 보단 자신을 지킬 정도의 수준엔 올랐다는 의미다. 바둑 기예를 9단계로 구분한 ‘위기구품’ (圍棋九品)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지만 초단의 무게감은 적지 않다. ‘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뜻에서 9단에게 붙여진 ‘입신’(入神)을 잡는 수졸은 흔하다.
이달 초 벌어진 ‘제24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우승상금 3억원) 통합예선에서도 초단 돌풍은 불어왔다. 중국의 신예 기사인 루리옌(18) 초단은 이 대회 C조 예선 결승에서 자국내 바둑 간판스타인 구리(36) 9단에게 승리, 22대1의 경쟁률을 뚫고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30대 중반이지만 구리 9단은 세계대회에서 8번이나 우승컵을 들어올렸던 중국 바둑의 아이콘이다. 루리옌 초단은 이 대회 예선에서도 강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됐던 셰얼하오(21) 9단을 돌려 세운 바 있다. 셰얼하오 9단은 ‘제22회 LG배 조선일보기왕전’ 우승자다.
떡잎부터 다른 초단 또한 주목 대상이다. 이달부터 일본 바둑 역사상 최연소 프로기사로 입단, 화제를 모은 나카무라 스미레(9) 초단이 주인공이다. 스미레 초단은 9년 전 후지사와 리나(20) 4단이 보유했던 11세6개월의 최연소 입단 기록을 갈아치웠다. 스미레 초단은 특히 한국 바둑 유학생 출신이란 점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유망주 육성 강화에 나선 일본기원에서 신설한 영재 특별 입단 전형의 1호가 스미레 초단이다.
아쉬운 대목은 경쟁상대인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최근 국내 초단의 존재감이 미미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2008년 당시 한상훈 초단이 두각을 나타낸 이후, 이듬해 3월 김승재(27) 초단이 ‘비씨카드배 신인왕전’(우승상금 2,000만원)에서 준우승으로 반짝했다. 이어 2014년 9월엔 박창명(28) 초단이 ‘한국물가정보배’(우승상금 4,000만원)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후엔 각종 기전에서 눈에 띄는 국내 초단의 활약상을 찾아보긴 쉽지 않다.
이처럼 될성부른 새싹 찾기가 어려워진 데는 최악의 상태로 위축된 국내 바둑계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는 게 바둑계 내부의 냉정한 진단이다. 현재 국내 종합기전은 KB바둑리그와 GS칼텍스배, KBS바둑왕전, 바둑TV배 마스터스, 용성전 등을 포함해 5개에 불과하다. 그나마 용성전은 일본 기업에서 후원하는 대회다. 15개 기전으로 치러졌던 1990년대 중반, 국내 바둑계 상황과 비교하면 초라한 형세다. 이 가운데 국내 대표 기전인 KB바둑리그(2018년 총 상금규모 34억원)의 경우엔 현재 참가팀조차 확정하지 못한 상태다. 현재까지 5~6개팀만 참가 의사를 밝힌 상황에서 올해 KB리그 출범은 다음 달에도 출범하기 어렵다는 게 한국기원의 판단이다.
한국기원 소속의 한 프로바둑 기사는 “최근에 바둑도장에 가면 속된 말로 머리 좋은 어린 친구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며 “바둑의 길로 들어섰다가도 다시 다른 분야로 빠져나가는 연구생들도 있다”고 푸념했다. 실제 최근엔 연구생 시절부터 촉망 받던 한 영재기사는 프로 입단에 성공한 이후, 정작 뚜렷한 비전과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며 바둑계를 완전히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중견 프로바둑 기사는 “결국 국내 프로바둑 대회의 활성화만이 현재 침체된 한국 바둑계에 활력을 가져올 수 있다”며 “세계 무대에서도 우리 보다 한 발 앞서 있는 중국과 대등한 경쟁 구도를 형성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고 조언했다.
허재경 기자 rick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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