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조현병을 비롯한 각종 정신질환과 연관된 강력범죄가 날로 그 흉악함을 더해 가면서, 정신질환을 과연 어떻게 관리하고 통제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첨예한 사회적 이슈가 되어 가고 있다. 심리학자 융이라면 이를 ‘그림자(shadow)’의 문제로 다루었을 것이다. 그림자는 범죄자에게만 드리우는 내면의 어둠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잠재된 인간 자체의 열등함, 콤플렉스, 다 잊은 줄로만 알았던 트라우마의 집합체를 말하는 것이다. 융은 이 세상 모든 지킬들이 자신의 하이드, 즉 지킬의 또 다른 모습인 그림자 인격을 낱낱이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인간은 인간 스스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지킬 박사의 페르소나(눈에 보이는 성격)’와 ‘하이드의 그림자(보이지 않는 콤플렉스와 사악함)’ 문제는 극소수의 특별한 환자들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집단무의식에 드리운 어둠이다. 인간은 한계상황에 부딪힐 때 누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섬뜩한 하이드의 본성을 드러낼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 안의 하이드, 우리 안의 그림자와 어떻게 화해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개인의 내면에 도사린 그림자가 폭력이나 범죄로 폭발하는 일을 막을 수 있을까. 나는 그 대안을 그림자를 보살피는 삶에서 찾는다. 개개인의 폭력성과 숨은 그림자를 대면하는 법을 훈련하면 분노가 우리 자신을 집어삼켜 초래하는 비극을 분명히 예방할 수 있다. 내가 평소에 어떤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는지, 어떤 사람을 보면 ‘분노의 방아쇠’가 당겨지는지, 어떤 상황이 올 때 마치 습관처럼 온몸이 떨리고 혈압이 오르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자신의 그림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한계 상황에 닥쳤을 때 훨씬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회복탄력성을 높여 정신의 면역력을 기르는 방법이다. 바이러스에 대처하기 위해 면역력을 높여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안의 그림자, 우리 안의 무의식과 좀 더 친밀해짐으로써 정신질환을 예방할 수 있다.
‘당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당신의 모습’이 바로 그림자다. 그림자는 우리가 아무리 거부해도 끊임없이 자신을 가로막는 자기 안의 장애물이다. ‘너는 성격이 너무 불같아’라는 말에 더욱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의 그림자는 바로 그 불같은 성격이다. “아버지를 꼭 닮았네!”라는 말에 버럭 화를 내는 사람은 아버지와 닮은 모습이 바로 그림자인 셈이다. 인정하기를 거부할수록, ‘의식’의 차원에서 그림자를 밀어낼수록, 그림자는 오히려 짙어진다. 그러나 그림자라고 해서 모두가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악의 원천’인 것은 아니다. 예술가들의 ‘창조의 원천’에는 대부분 ‘그림자 문제’가 연루되어 있다. 그림자를 창조적인 예술의 영감으로 승화시킨 예술가들이 바로 베토벤, 고흐, 카프카 같은 이들이다.
남들에게 우아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화가 나도 참고, 옳은 일이 아니어도 참고, 슬퍼도 참았다면, 바로 그 부당한 견딤의 시간들이 그림자의 퇴적층을 이루게 된다. 이렇게 억압된 진짜 감정은 ‘그림자’가 되어 언젠가는 우리 자신의 뒤통수를 치게 된다. 심리적으로 건강해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그림자를 ‘의식화’시켜서, ‘나에게 이런 슬픔이 있었구나’하고 깨닫는 과정, 그 슬픔과 화해하기 위해 자신을 너무 다그치지 않고, 좀 더 편안하게 해주는 과정을 일컫는다. 그림자를 길들인다는 것, 그것은 마침내 그림자와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한 아름다운 몸부림이다.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잠시 혼자 있어 보라. 분노의 이면에 켜켜이 쌓인 ‘내 인생의 분노의 역사’를 되돌려 보자. 오랫동안 차곡차곡 쌓여 마침내 터져나온 당신의 분노를 가엾게 여겨보라. 달래주고, 토닥여주고, 마침내 홀로서기할 수 있도록 감정의 분출구를 열어주자. 여기서 ‘승화’가 중요하다. 분노의 에너지를 창조나 예술의 에너지로 승화시킬 다른 방식을 찾아보자.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순간. 분노를 억제할 수 없는 시간. 바로 그 순간이 내면의 신호에 귀 기울일 시간, 그림자를 돌볼 시간이다. 당신 안의 가장 아픈 상처를 보듬을 시간, 마침내 상처마저 자신의 가장 소중한 보물로 다룰 시간이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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