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ㆍ2순위 아파트 청약 이후 ‘미계약(부적격자 혹은 계약 포기)’ 물량을 추첨해 당첨자를 선정하는 ‘무순위 청약’에 시장의 관심이 뜨겁다. 청약 통장도 필요 없고, 주택 소유 여부와 관계 없이 19세만 넘으면 누구나 새 아파트 분양권을 손에 쥘 수 있는 특징 탓이다.
하지만 한편에선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가 실수요자 중심 청약제도를 만든다며 유주택자의 1순위 기회를 차단했는데, 부동산 규제로 자금 마련이 어려워진 청약 당첨자들이 계약을 포기하는 틈을 타 현금이 풍부한 유주택자들이 다투어 무순위 청약에 뛰어들고 있어서다. 무순위 청약에도 무주택자 우선 조항을 넣거나 무주택자에 대한 대출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무순위 청약 뭐길래
23일 국토교통부 등에 따르면, 무순위 청약은 작년말 개정된 주택공급 규칙에 따라 올해 2월 이후 입주자 모집공고를 낸 단지에서 진행된다. △미계약ㆍ미분양에 대비한 ‘사전접수’ △잔여가구를 추가로 모집하는 ‘사후접수’ △불법전매 등 공급질서 교란자의 주택을 회수해 모집하는 ‘계약취소분 재공급’ 등 세 가지로 나뉜다.
무순위 청약엔 청약통장이 없어도 만 19세 이상이면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다. 당첨자 이력도 남지 않아 다른 물량에도 1순위 청약을 넣을 수 있다. 일반 청약과 마찬가지로 금융결제원이 운영하는 ‘아파트투유’에서 일괄 관리된다.
사실 무순위 청약은 예전부터 있던 제도다. 1ㆍ2순위 청약이 끝난 후, 개별 건설사가 공지를 띄워 선착순 또는 추첨 방식으로 알아서 분양했다. 하지만 대리 줄서기나 번호표 판매 등 공정성 시비가 계속되자 정부는 올 2월부터 아파트투유에서 청약 신청을 받도록 경로를 바꾸었다.
애초 국토부는 “잔여 물량을 무주택자에게 추첨 방식으로 공급한다”고 밝혔지만 정작 무주택자 우선 원칙이 적용되는 경우는 ‘계약 취소’ 주택에 한해서다. 계약금까지 낸 계약취소가 아니라 1ㆍ2순위 당첨 후 자금 마련이 어려울 것 같아 계약을 포기했거나, 가점 계산을 잘못해 부적격자로 분류돼 계약 없이 탈락한 경우는 ‘계약 취소’가 아니라 ‘미계약’에 해당된다. 이 경우엔 주택 소유 여부와 관계없이 누구나 잔여가구의 무순위 추첨에 참여할 수 있다.
◇왜 논란 되나
무순위 청약은 최근 미계약 물량이 급증하면서 존재감이 더욱 커지고 있다. 1순위 청약 자격이 대폭 까다로워진데다 서울에서도 미계약이 나오기 시작하자, 인기 단지만 아니라면 청약통장을 쓰지 않아도 분양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당첨 후 계약을 포기해도 불이익이 없어 가점이 낮은 무주택자부터 다주택자까지 신청자가 대거 몰리고 있다.
실제 지난 10일과 11일 이틀간 서울에서 처음 ‘사전 무순위 청약’을 진행한 동대문구 ‘청량리역 한양수자인 192’에는 무려 1만4,376명의 신청자가 몰렸다. 일반분양 물량(1,129가구)의 13배가 무순위 청약에 뛰어든 것이다.
지난 16일 서울 서대문구 ‘홍제역 해링턴 플레이스’의 ‘사후 무순위 청약’에는 미계약분 174가구 모집에 5,835명이 몰려 33.53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이는 이 단지 일반 청약경쟁률(10.97대 1)의 3배 이상이다. 최근 부동산 시장에는 미계약분만 ‘줍고 또 줍는다’는 의미로 ‘줍줍’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이에 무주택자에게 청약 기회를 넓혀 준다는 제도 취지는 무색해지고, 현금이 풍부한 재력가에게 입지 좋은 아파트 당첨 기회를 제공한다는 비판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말 정부가 무주택 실수요자들의 청약 당첨기회를 높였지만, 정작 무주택자들은 높은 분양가와 대출 장벽에 막혀 청약에 당첨되고도 계약을 포기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9억원 넘는 아파트는 공공기관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분양보증이 나오지 않아 중도금 대출을 받기 어렵다.
실제 중도금 집단대출이 되지 않는 분양가 9억원 초과 아파트는 계약 포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서대문구 ‘홍제역 해링턴 플레이스’는 전 주택형이 1순위 마감했지만 당첨자의 41.5%가 끝내 계약을 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이런 청약제도의 허점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심교언 건국대 교수는 “무주택자 우선 조항을 넣거나 부적격 당첨자 등을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기중 기자 k2j@hanl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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