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호(1903~1974)는 전남 고흥 출신 독립운동가다. 그는 광복 후 4선 의원을 지내며 고만고만한 당대 정치인들 틈바구니에서 몇 차례 도드라진 이력을 남겼다. 하나가 1952년 4월 24일 현역 육군대위 서창선을 권총으로 사살해 8년간 옥살이를 한 일이고, 또 하나는 신생 민주사회당 대표최고위원이던 1966년 민사당 창당 발기문에 북한 김일성과의 면담 남북 교류 의사를 밝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일이다. 전자는 이승만 자유당 집권기의 일이고 후자는 박정희 정권 하의 일이었다.
전남 순천 평화관이란 음식점에서 일어난 일이라 ‘순천 평화관 사건’이라 불리는 전자는, 정황과 증언에 따르면 정당방위였다. 당시 국회 내무위원장이던 서민호는 임박한 도의원선거 등을 앞두고 전남 지역을 시찰하던 중이었고, 그날 분과위원들과 저녁 식사를 하던 참이었다고 한다. 서창선은 식당 옆방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다 경호원에게 발각되자 약 5m 거리에서 권총을 뽑아 서민호를 향해 쏘았다. 경호원들의 제지로 저격은 실패했고, 그 와중에 서민호는 자신이 지닌 호신용 권총으로 서창선을 사살했다. 서민호는 국군의 거창양민학살사건 국회조사단장을 맡아, 군부로선 그를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57년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4ㆍ19혁명 직후 의회 석방 결의로 8년 만인 60년 4월 29일 출옥했다. 암살 미수의 배후는 물론 밝혀지지 않았다.
66년 구속의 죄목은 ‘반공법’이었다. 서울지법은 그가 “북괴를 합법 정부인 대한민국과 동등한 지위로 취급했다”며 징역 2년(자격정지 2년)의 실형을 선고했고, 4년 뒤 항소법원은 그의 발언을 정치행위로 판단, 위법성 조각 사유를 인정해 무죄를 선고했다. 그는 4선 의원을 지냈으나 모두 야당이었고, 8대 의원 선거 낙선 직후인 73년 정계를 은퇴했다.
그는 3ㆍ1운동 직후인 1919년 보성고보 재학 중 독립운동 지하 유인물 ‘반도의 목탁’ 배포 사건에 연루돼 6개월 형을 살았고, 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다시 1년을 복역했다. 일본 와세다대 정경과를 나와 미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으로 석사학위를 땄고, 광복 직후 초대 광주 시장을 거쳐 전남도지사를 지냈다. 최윤필 선임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