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韓進)그룹의 이름은 의미심장하다. ‘한민족(韓民族)의 전진(前進)’이란 뜻을 담아 1945년 창업주 조중훈이 인천에서 트럭 1대로 시작한 한진상사가 모태다. 이병철의 삼성상회(삼성), 정주영의 현대자동차공업사(현대), 구인회의 락희화학공업사(LG) 등 창업주가 세운 회사 이름에서 유래했거나, 창업주의 호(금호 박인천)를 사용한 기업들과는 뭔가 달라 보인다.
창업이념도 ‘수송을 통해 국가에 기여한다’는 수송보국(輸送報國)이다. 크게 한눈 팔지 않고 항공ㆍ운수ㆍ물류 산업에 집중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존경받는 민족기업의 아우라가 풍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진의 역사는 그렇지 못했다.
조중훈은 한국전쟁 후 미군의 군수품을 수송하며 사업을 일으켰다. 1956년 한 트럭운전사가 미군의 겨울 파카 1,000여벌을 빼돌려 남대문시장에서 트럭째 팔아넘긴 사건이 발생했을 때 조중훈이 직원을 동원해 이를 모두 되사들여 미국에게 돌려준 일화는 유명하다.
미군의 신뢰를 얻은 조중훈은 1961년 주한미군의 통근버스 20대를 매입해 서울~인천 구간에서 국내 최초 좌석버스 사업을 시작했고, 이게 한진고속의 시초가 된다. 그리고 베트남전쟁이 시작되자 미 군수품 수송 계약을 따내 무려 1억3,0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당시 한국은행이 보유했던 외화의 3배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한반도 전문가인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조중훈을 “이승만 정권과 미 8군의 젖줄을 차지하는 경쟁에서 이긴 승리자”라고 표현했다.
이처럼 사업 수완이 뛰어났던 조중훈은 다른 재벌들처럼 정경유착을 통해 몸집을 불린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아주 가까웠던 그는 1970년대 불국사 복원 때 ‘대통령의 만수무강을 빈다’는 글이 새겨진 종을 헌납했다. 이른바 ‘박정희 신종’이었다. “지금까지 전두환 대통령 외에 다음 대통령이 될 만한 대타를 찾아본 적이 없다”고 말하며 전두환 정권과도 밀착했다.
권력과의 밀착에는 달콤함만 있는 건 아니다. 거액의 부채를 가진 부실투성이 국영기업들을 정권의 요청에 따라 인수해야 했다. 대한항공도 그런 케이스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압박으로 당시 채무가 27억원이 넘었던 국영항공사 대한항공공사를 억지로 떠안았다. 세 차례 거절의 뜻을 밝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후 대한선주(한진해운과 합병),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도 리스크를 떠안고 ‘울며 겨자먹기’로 인수한 기업들이다. 지금은 파산(한진해운)했거나 자본잠식 상태(한진중공업)이지만, 한때 한진의 이름을 달고 세계 시장에서도 손꼽히는 기업으로 주목받았다. 대한항공은 대형항공사들도 한 순간에 파산하는 치열한 항공업계에서 살아남아 글로벌 항공사로 성장했다.
조양호 회장은 정권과 늘 긴장관계였다. 항공기 사고를 이유로 김대중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이례적으로 민간 기업의 오너 경영을 문제 삼았고, 대한항공은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았다. 조 회장은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의 일등공신이었으나 박근혜 정부는 그를 올림픽조직위원장 자리에서 내쫓았다. 가족들의 갑질 논란이 불거지면서 조 회장과 한진은 문재인 정부 들어 검찰, 경찰, 세무당국으로부터 18 차례 압수수색을 당했고,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로 조 회장은 대한항공 경영권을 잃기도 했다.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온 여러 인물들처럼 기업에게도 어두운 역사와 밝은 역사가 공존한다. 기업을 성장시킨 기업인의 공적과 과오도 무 자르듯 단순하게 평가하기 쉽지 않다. 한진그룹과 조 회장 부자(父子)도 마찬가지다. 정치 권력을 등에 업고 꿈꿨던 ‘수송보국’의 이념은 흐릿해졌지만, 대한항공은 여전히 국내 최대 국적항공사이고, 한국을 대표하는 ‘날개’다.
조 회장 죽음에 대해 자유한국당은 현 정부의 책임이라며 정치적 공세를 폈지만, 국민연금은 이미 이명박ㆍ박근혜 정부 시절에도 조 회장의 이사 선임에 반대했었다. 재계는 최근 한진이 겪은 사태를 정권의 ‘기업 길들이기’로 받아들이고 있다.
정권에 따라 부침을 반복한 기업의 역사를 되새긴다면, 한진그룹의 위기를 정쟁거리로 삼고, 대한항공의 미래를 정치적인 계산 속에 가둬선 안되겠다.
한준규 산업부장 manbok@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