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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석학 칼럼] 백인 구원자 딜레마

입력
2019.04.22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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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코믹릴리프(Comic Relief)는 국내외 불우이웃을 위해 기금을 모으는 영국 자선단체다. 2년에 한 번씩 회원들이 개최하는 ‘레드노즈데이(Red Nose Day)’는 코미디언과 유명인사가 등장하는 화려한 TV쇼로 막을 내린다. 올해는 6,350만 파운드(940억원)를 모았다. 많은 돈이지만 2년 전에 비해 800만 파운드가 줄었다.

행사 2주 전 토트넘 시의원이었던 데이비드 래미가 코믹릴리프를 비난하고 나섰다. 방송인 스테이시 둘리를 우간다로 보내 흑인아이를 안고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 이유다. 흑인인 래미는 트위터에 “세상은 더 이상 백인 구원자가 필요하지 않다”며 사진이 “지긋지긋하고 도움도 안 되는 고정관념을 퍼트릴 뿐”이라고 덧붙였다. 대신 “아프리카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영국의 한 TV쇼에서 래미는 자선은 좋은 일이라면서도 “코믹릴리프는 (대부분 백인) 코미디언을 출연시키고 아프리카에 유명인사를 보내는 20년 전 방식이고, 이것은 영국의 많은 소수민족에게 흑인 아이를 안은 아름다운 백인 여자 주인공으로 대변되는 식민지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며 그 안에 자선단체나 부모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래미는 진보주의자들에게서 어느 정도 지지를 얻었고 아마 올해 레드노즈데이 기부에 영향을 주었을 지도 모른다. 백인 유명인사는 코믹릴리프에 나오지 말아야 할까.

그 자선단체는 아마도 흡인력이 큰 유명인사를 참여시켜 기부금을 가능한 한 많이 모으려 했을 것이다. 자선단체 운영자는 기부금 행사에 백인 유명인사를 참여시키지 않으면 그 금액이 확실히 줄어들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래미도 코믹릴리프가 백인 유명인사의 도움 없이 많은 돈을 모을 수 있다고 한 적은 없다. 더 적은 돈이 걷히면 도와줄 수 있는 아프리카인도 줄어들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둘리는 “돈으로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 말입니다”라고 했다.

래미는 세상에 더 이상의 백인 구원자가 필요 없다고 했는데, 이는 세상에 딱 필요한 만큼의 백인 구원자가 있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백인 구원자 수가 적어지면 세상이 더 나은 곳이 될 거란 말로 들릴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세상이 더 많은 구원자 또는 극빈층 사람들을 돕는 데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을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매년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안전한 식수, 위생시설, 기본 건강관리, 말라리아 모기를 막을 모기장이 없어서 숨지고 있다. 어떤 이는 간단한 백내장수술을 받을 돈이 없어서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간다. 어떤 여성들은 출산 때 문제로 발생한 몸 속 구멍으로 요실금이 생기고 질과 방광, 직장 (또는 둘 다)사이에 생긴 그 구멍을 치료할 수 없어 사회 낙오자가 되고 있다. 이런 문제를 줄이기 위해 시간과 돈, 생각을 투자하는 사람들은 많을수록 좋다.

“데이비드, 내가 백인인 게 문제인가요.” 트위터에 남긴 둘리의 말은 래미와 그의 추종자에게 극빈층 아프리카인들의 삶을 개선하는 사람이 백인이거나 아프리카인이 아닌 것이 문제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중국의 존재감이 커지고 있는 지금 충분히 현실성이 있는 질문이다.

일부 진보주의자들은 중국의 아프리카 투자를 환영할 수 있다. 서구 개입의 대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이 바라는 것은 아프리카 대륙 밖의 사람보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변화를 주도하는 것일 게다. 그들의 바람이 그런 것이라면 “백인구원자”에 대한 비판은 자충수다. 그들도 대부분 아프리카인이 아닌 외부인이기 때문이다. 래미는 흑인이지만 영국인이며 하버드 법대를 졸업했다. 흑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서구 자선단체들이 도우려는 아프리카인들의 대변인이 되지는 않는다.

극한 빈곤은 세계적으로 줄어들고 있지만 빈곤층의 절반 이상이 사는 사하라사막 이남에서는 오히려 계속 늘고 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30년까지 전세계 극빈층의 90%가 사하라사막 이남에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 아프리카의 극심한 빈곤을 아프리카인들의 손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렇지 못하다.

기부자가 누군지에 따라 지원을 받을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아프리카 극빈층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와 관련된 사례가 있다. 영국의 말라리아퇴치재단이 토고인들에게 모기장을 주며 말라리아로부터 자녀를 보호하는 방법을 설명하자 그들은 모기장을 받아 사용했다. 마찬가지로 기브다이렉틀리(GiveDirectly)가 케냐 시골의 모든 성인에게 연간 274달러 정도의 기본소득을 12년 동안 무조건 제공하겠다고 하자 거부하지 않았다. 빌리지엔터프라이즈(Village Enterprise)가 소규모 사업을 시작할 투자금, 교육 및 멘토링을 동아프리카인들에게 제공했을 때 모두 열정적으로 등록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 중 자선단체 지도자가 어느 인종인지 아프리카인인지 따지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극빈자를 돕는 게 목적이면 구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찾는 것이 맞다.

피터 싱어 미국 프린스턴대 생명윤리학 교수

ⓒProject Syndic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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