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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장애인 배려는 인권’ 미 장애인법 철학적 기초 닦다

입력
2019.04.22 04:47
수정
2019.04.24 17:53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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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타 실버스(1940~2019)

※ 세상을 뜬 이들을 추억합니다. 동시대를 살아 든든했고 또 내내 고마울 이들에게 주목합니다. ‘가만한’은 ‘움직임 따위가 그다지 드러나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은은하다’는 뜻입니다. ‘가만한 당신’은 격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애니타 실버스는 장애인 차별은 복지 문제가 아니라 시민권 인권의 문제라고 주장한 철학자다. 그는 1990년 미국 장애인법(ADA)의 법철학적 기초를 닦는 데 기여했고 법 적용 사례를 연구해 그 원칙이 현실에서 구현되도록 감시했다. 그는 소아마비 장애인으로서 장애에 대한 고정관념과 맞섰고, 철학자로서 정상(Normal)- 비정상의 허술한 개념적 경계를 허무는 데 힘썼다. philosophy.sfsu.edu
애니타 실버스는 장애인 차별은 복지 문제가 아니라 시민권 인권의 문제라고 주장한 철학자다. 그는 1990년 미국 장애인법(ADA)의 법철학적 기초를 닦는 데 기여했고 법 적용 사례를 연구해 그 원칙이 현실에서 구현되도록 감시했다. 그는 소아마비 장애인으로서 장애에 대한 고정관념과 맞섰고, 철학자로서 정상(Normal)- 비정상의 허술한 개념적 경계를 허무는 데 힘썼다. philosophy.sfsu.edu

프랭클린 D. 루스벨트(1882~1945)는 39세이던 1921년 소아마비 바이러스에 감염됐고, 재활치료 후 정치를 재개해 뉴욕주지사(28년)와 대통령(32년)이 됐다. 그는 선거운동 과정에 장애-재활을 적극적으로 알리며 그 이력을 정치적 밑천으로 활용했지만, 걸음걸이 같은 장애의 ‘증상’을 드러내는 건 극도로 꺼렸다. 그의 평전을 쓴 사학자 제임스 토빈(James Tobin)은 “절름거리는 걸(crippled, 루스벨트가 쓰던 표현)본 이들이 자기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디를 쳐다봐야 할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하는 걸 못 견뎌 했다. 당신이 장애인이라면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겠지만, 그들 중에는 어떻게 연민이나 동정을 표할지 궁리하는 이도 있었다.” 루스벨트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표나지 않게 움직이는 법을 연습했고, 회의장 등 공식 석상에는 가급적 남들보다 먼저 가 있곤 했다. 소아마비 백신이 발견된 건 1955년이었다.

1967년 캘리포니아주립대(CSU) 철학과 교수가 된 소아마비 장애인 애니타 실버스(Anita Silvers)가 학생들보다 먼저 강의실에 가고 맨 나중에 나온 사정은 조금 달랐다.(sfchronicle.com) 루스벨트와 달리 그는 갓 임용된 20대 미혼여성이었고, 그에게 장애는 자산이기는커녕 명백한 핸디캡이었다. 교수 임용 전 지도교수는 그에게 장애 사실이 드러나지 않게 대인면접을 안 보는 대학을 골라 지원하라고 조언할 정도였다.(bioethics.net) 그렇게 임용된 터여서 그로선 장애가 무슨 ‘경력 위조’의 물증처럼 여겨졌을지 모른다.

장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 혹은 차별의 문제의식은 거의 백지 상태였다. 장애인용 경사로나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공공건물은 드물었고, 대학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실버스의 연구실ㆍ강의실이 늘 1층인 것도 아니어서 그는 계단을, 루스벨트처럼 부축해주는 비서나 경호원도 없이, 주변 사람들의 시선까지 의식하며 오르내려야 했다.

1960년대는 제도ㆍ관습의 불의와 억압에 세상이 한껏 성나있던 때였고 그의 대학은 시대정신의 거점 중 한 곳이었다. 그는 자신의 불편과 고통이 자기(장애) 탓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세상도 이해하기를 원했고, 이해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미학과 예술철학을 가르치던 그가 장애의 철학적 함의 등을 본격적으로 다룬 첫 저서를 낸 것은 90년대지만, ‘노멀(Normal)’의 기준 바깥으로 밀려난 소위 ‘비정상(Abnormal)’ 혹은 소수성의 철학적 개념과 의미에 천착한 것은 훨씬 이전이었을 것이다.

그는 장애인들이 겪는 불편과 상대적ㆍ절대적 불우가 복지나 사회안전망 차원에서 보살피고 배려할 문제가 아니라 시민권ㆍ인권 차원에서 마땅히 보장해야 할 문제라고 선구적으로 주장한 철학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장애인 권리장전이라 불리는 1990년의 미국 장애인법(ADA, 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이 64년 시민권법의 구조와 틀을 준거로 제정되게 하는 데 기여했고, 그 법의 해석 및 집행 사례를 철학적으로 분석해 법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도록 방어하는 데 앞장섰다. 장애에 대한 ‘정상인’들의 인식 장애를 연구하며, ‘노멀’이 의심받지 않고 누리는 부당한 우월적 지위와 여성과 이민자, 장애인 등 약자ㆍ소수자 차별의 현실에 개념적-실천적으로 개입했던 애니타 실버스가 3월 14일 별세했다. 향년 79세.

실버스는 1940년 11월 1일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만 8세 때인 49년 걸스카우트 캠프에 갔다가 소아마비 바이러스에 감염됐는데, 워낙 중증이어서 철폐(鐵肺, Iron Lung)라 불린 인공호흡 장치 속에서 1년여를 지냈다. 그는 평생 신경 손상으로 인한 사지부분마비(quadriplegia) 장애와 더불어 살았다. 뉴욕 사라로렌스 칼리지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볼티모어 존스홉킨스 대학서 67년 박사학위를 땄다. 그의 남자 형제인 데이비드는 애니타가 CSU의 샌프란시스코주립대 근처로 이주하기 위해 동부에서 서부까지 대륙을 횡단하며, 고장 수리나 부품 조달이 편한 미국 차 대신 영국 차 로버(Rover)를 고집스레 선택한 일화를 소개했다. 데이비드는 “애니타에겐 자동차가 자신의 소우주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장애가 있든 없든, 로버가 좋으면 로버를 가져야 하는 게 애니타였다”고 말했다.(nyt, 2019.3.22)

사라로렌스 칼리지 학부생은 누구나 지정된 교내 봉사활동을 일정 시간 이수하는 게 필수였다. 학교측은 휠체어나 목발 같은 보행보조기 없이는 거동을 못하던 애니타를 위해 학교 식당 부엌서 야채를 다듬는 일이나 도서관 책을 이동수레에 담는 일 등 한 자리에 앉아서 해낼 수 있는 일거리를 배정했다. 그가 먼저 요청한 게 아니라 학교측이 알아서 그렇게 조치한 거였다. 훗날 그는 그 일화를 전하며 “만일 학교측이 내게 장애 때문에 해내지 못할 일을 시켰다면 감정적으로 무척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장애인 권리를 규정한 법이 생기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고, “내가 조직의 완벽한 일원임을 느끼게 해준 첫 경험이었다”고 말했다.(diverseeducation.com) 육체적ㆍ정신적 손상(장애)이 그 자체로 공적 영역에서 배제될 근거가 아니라는 것, 각자 특수한 능력 범위 안에서 노동에 참여하고 사회에 통합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제대로 된 국가ㆍ사회ㆍ공동체의 의무이며, 장애의 의미나 개념도 의료적 맥락에서처럼 본질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조정되고 변화해야 한다는 이른바 ‘장애학(disability studies)’의 대전제를 그는 그렇게 설명했다. 그는 사회가 부여한 장애에 대한 부정적 정체성과 싸웠다.

장애인의 동등한 사회 참여와 독립적 삶의 권리를 요구하며 장애인 60여 명이 휠체어와 보행보조기를 내버리고 워싱턴 D.C 국회의사당 계단을 기어 오른 1990년 3월 12일의 ‘캐피털 크로올 Capitol Croawl’시위. 조지 H.W. 부시 대통령은 그해 7월 26일 미국장애인법(ADA)에 서명하며 “수치스러운 차별ㆍ배제의 벽을 마침내 허물게 됐다”고 선언했다. AP 연합뉴스
장애인의 동등한 사회 참여와 독립적 삶의 권리를 요구하며 장애인 60여 명이 휠체어와 보행보조기를 내버리고 워싱턴 D.C 국회의사당 계단을 기어 오른 1990년 3월 12일의 ‘캐피털 크로올 Capitol Croawl’시위. 조지 H.W. 부시 대통령은 그해 7월 26일 미국장애인법(ADA)에 서명하며 “수치스러운 차별ㆍ배제의 벽을 마침내 허물게 됐다”고 선언했다. AP 연합뉴스

애니타가 학생ㆍ동료들의 시선으로부터 감추려던 모습들, 예컨대 안간힘 다해 계단을 기어오르는 행위가 언젠가부터 대학당국에 대한 항의 시위가 됐다. 그는 70년대 대학 내 장애학생 권리를 위한 협상 대표단을 조직해 이끌었고, 주 의회 증언대에 서서 공공기관 장애인 편의시설 의무화를 역설했다. 미국 시각장애인연합회(NFB)가 설립자인 시각장애인 활동가 저코버스 텐브로크(Jacobus tenBrork, 1911~1968)의 생애를 기리기 위해 개최한 심포지엄에서 실버스는 자신이 장애인 인권문제에 관심을 쏟게 된 계기 중 하나로, CSU 시각장애인 학생 두 명이 수학과목 수강을 거부당했다며 자기를 찾아와 도움을 청한 일을 소개했다. “수학과 교수를 찾아가 경위를 따져 물었더니 자기로서는 칠판을 못 보는 이에게 어떻게 수학을 가르쳐야 할지 모른다며 내게 ‘당신도 수업 중 칠판을 이용하지 않느냐’고 묻더군요. 제가 말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저는 칠판을 안 씁니다. 칠판에 손이 닿질 않거든요.’” 그는 비장애인을 준거로 운영되는, 수업을 포함한 대다수 공동체의 논리, 표준이어서 누리는 혜택과 표준 바깥의 존재들이 겪어야 하는 소외와 불편을 그렇게 환기했다.

2000년 철학잡지 ‘PhilosophyNow’에 기고한 글에서 실버스는, ‘노멀’에 근거한 관점들이야말로 대변되지 않는 소수 혹은 ‘비정상’에 대한 인식의 결핍ㆍ배제를 전제한다며, 그런 이론적ㆍ철학적 한계와 맹점을 보완해주는 게 장애의 사유라고 썼다. 그리고 시각ㆍ청각 등 장애인들의 감각적 세계 인식이 비장애인에 비해 결코 열등하지 않지만, 그런 사실을 비장애인에게 이해시키고 입증할 책임까지 장애인은 짊어져야 한다고, 여러 사례를 통해 설명했다.

경사로나 엘리베이터 설치, 시각장애인을 위한 컴퓨터 소프트웨어 구축 등 장애인 시설 보강에 대한 가장 완강한 저항의 근거는 당시나 지금이나 공리주의적 경제성 원칙이다. 예산ㆍ공간 등 제한적 조건 하에서 최대다수의 행복을 추구하자니 어쩔 수 없이 우선순위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윤리적으로 제어되지 않은 욕망이 금세 추해지듯, 제어되지 않는 공리주의 논리는 결국 다수인 ‘노멀’들의 이익을 정당화하고 차별을 합리화하는 데 복무한다. 60, 70년대 인권ㆍ시민권의 시대를 건너온 적잖은 미국인들에게 장애인 문제가 시혜나 복지 차원의 사안이 아니라 보편 인권의 문제라는 실버스의 주장은 무척 강렬했다. 연방 기관 및 관련 사업장 장애인 차별 금지를 규정한 ‘재활법(Rehabilitation Act, 1973)’과 공립학교 장애인 교육권을 보장한 ‘장애아동 교육법(Education for All Handicapped Children Act, 1974)’ 등을 모두 그의 공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를 빼고 저 법적 진전을 말할 수도 없다. 캘리포니아의 인권과 개방ㆍ다양성 등 인문적 가치를 확산하자는 취지로 75년 출범한 비정부기구 ‘캘리포니아 휴머니티스’ 는 78년의 ‘가장 도드라진 휴머니스트(California Distinguished Humanist)’로 그를 꼽았고, 80년 지미 카터 정부는 국립인문학재단(NIH)의 이사회 격인 국립인문학위원회(NCH) 26인 이사진에 그를 포함시켰다.

장애의 불편과 한계를 잘 아는 그는 장애를 사회적으로 구성된(혹은 강제된) 불의라며 실체를 부정하려는 급진적인 입장이, 차별 못지않게 장애인을 힘들게 하는 ‘그릇된 온정주의(misplaced Paternalism)’라고 비판했다. 예컨대 그는 제도의 타락ㆍ악용을 우려해 장애인단체 대다수가 반대하는 조력자살 합법화에 대해서도 유보적이거나 긍정적이었다. 국립의학아카데미의 의사조력자살 워크샵에서 그는 “조력자살 희망자가 약을 스스로 투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개인의 선택권을 존중하지 않는 그릇된 보호주의이며, 그들을 더 큰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주장”이라고 말했다.

2017년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주립대의 ‘Wang Family Excellence Award’ 시상식장의 애니타 실버스. 그는 상금으로 장애인 등 소수자 연구 장학기금을 마련했다. SFSU 트위터.
2017년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주립대의 ‘Wang Family Excellence Award’ 시상식장의 애니타 실버스. 그는 상금으로 장애인 등 소수자 연구 장학기금을 마련했다. SFSU 트위터.

그는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젊은 교수들과 다를 바 없이 수업했다. 재직 만 50년을 앞둔 2016년 8월 인터뷰에서 그는 “은퇴나 파트타임 강의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학위를 받고 일자리를 찾을 때 사람들은 내게 교수가 되기엔 ‘너무 약하다’고 말하곤 했다. 존스홉킨스대 학위 과정 중에도 나는 남학생 300여 명을 대상으로 대형 강의실에서 수업을 진행한 바 있었다. 나는 결코 ‘너무 약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장애인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나를 보려 했다”고 말했다.(news.sfsu.edu) 포드나 시보레가 아닌 로버를 선택한 20대의 그처럼, 그는 온 생애를 두고, 이론과 실천 모든 면에서 편견과 고정관념에 저항했다. 교육자로서 그는 “어떤 사안이든 ‘이 일은 이렇게’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능력도 권한도 내겐 없고, 단 하나의 길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학생들 개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을 보려고 한다. 고정관념을 버리면 그들이 직접 당신을 인도할 것이다”라고도 말했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학자와 교수도 많았지만 인권 관련 활동가도 많았다. 제자 중 한 명인 CSU 교수 저스틴 티월드(Justin Tiwald)는 “실버스는 유한자인 우리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관대함으로 자신의 지식과 시간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곤 헸다”고 말했다. 실버스는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북돋우고, 시야와 생각을 넓혀 삶을 가로막는 장벽들을 해쳐나가는 새로운 길을 찾는데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건 나로선 큰 기쁨이고 특권”이라고 말했다. 사실 정상- 비정상, 장애- 비장애, 여성- 남성, 흑인- 백인의 개념적 경계, 나아가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정상’의 개념이 그에겐 대부분 고정관념이었을 것이다. 그는 미국철학회의 Quinn prize(2009)과 CSU의 ‘Wang Family Excellence Award’(2017) 등 여러 상을 탔고, 상금 일부로 여성과 소수민족ㆍ인종, 장애인 연구자를 위한 장학 재단을 만들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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