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후반에 인생목표가 생겼습니다. 늦진 않았죠. 지금껏 산 시간보다 더 살 테니까요.”
김일식(65)씨는 평생을 전기기술자로 일했다. 직장생활 30년 중 15년은 공사현장을 찾아 국내 이곳 저곳을 전전했고, 나머지 15년은 사우디아라비아와 리비아를 떠돌았다. “8남매 중 장남이어서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했죠.” 전후 세대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그러했듯 그 역시 공업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인생살이가 항상 불만이었어요.” 그가 젊은 날을 소회할 때면 내뱉는 한 마디. 누군 ‘청춘’이라 예찬을 한다지만 그에겐 술과 담배로 버텨나가던 힘든 시절이었다. 소주 3병, 맥주 10명. 그가 매일같이 잠들기 전 배 속에 채워 넣어야 했던 술은, 그렇게나 많았다.
그랬던 그가 50대 후반에 펜을 잡았다. 술은 줄이고 담배는 끊었다. 글로벌사이버대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해 4년 과정을 3년 만에 끝내버렸다. “나이가 벌써 환갑이어서 박사 과정까지 하려면 하루빨리 졸업해야 했으니까요.” 조기졸업의 이유였다. 곧바로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을 취득했고, 뇌교육학 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해 4년 과정 석ㆍ박사 통합 과정도 밟았다. 2017년 그의 손에 박사학위증이 쥐어졌다.
그가 요즘 ‘뇌 유연화에 대한 신경가소성 관점에 대한 고찰’이란 멋들어진 제목의 논문을 준비 중이다. 물론 첫 논문은 아니다. 지금까지 학술 등재지에 실린 논문만 12편에 달한다. 최근에는 ‘뇌활용 120세 연구소’ 소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노인들을 대상으로 치매, 우울증 등의 예방을 위한 강의를 하고 다니느라, 분주하기만 하다.
“시간을 그저 흘러 가는 대로 두고 싶지는 않았어요.” 9일 충남 천안시의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에서 만난 그는 ‘인생에서 새로운 2막을 시작할 수 있게 한 이유’를 묻자 그렇게 툭 한 마디를 던졌다. 어느 날 아침 도를 터득하듯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기대했던 거창한 이유가 아니었다. “저희 한계수명이 120세 정도입니다. 지금껏 살아온 인생만큼 시간이 남았습니다. 새로운 인생을 살기에 충분하죠.”
◇쫓기듯 살던 인생 1막
“선생님이 교실에서 시를 하나 읽어줬어요. ‘미칠 듯한 파도’라는 시구에서 쥐구멍에 숨고 싶다는 부끄러움이 갑자기 느껴지더라고요.” 김씨는 부산에서 8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외박이 잦던 아버지와 조현병을 앓던 어머니 사이에서 그는 장남의 무게만 지닌 채 덩그러니 방치돼 있었다. 집은 가난했고, 허공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는 어머니를 돌보는 게 여간 버거운 게 아니었다. “미쳤다”라는 말이 주변에서 두서 없이 들릴 때가 있었고, 김씨는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피해의식에 시달리며 살았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자존감이 없었어요. 스스로를 부끄러워만 했죠.” 그는 동생들 학비 때문에 1973년 부산의 한 공업고등학교 전기과를 졸업했고, 곧바로 취업에 나섰다.
어쩌면 그는 운이 좋았다. 경쟁률 50 대 1이 넘는 한 대기업 전기기술직에 합격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기간산업육성법’이 만들어지면서 군복무를 회사일로 대신할 수 있었다. 김씨는 “군대를 가게 됐으면 동생들이 먹고 살기가 어려워 졌을 것”이라며 “회사에서도 제 학력이 고졸이었지만 대졸자와 동등한 대우를 해줬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를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게 있었다. 알 수 없는 불안과 지독한 외로움. “공사 현장에서 만나는 인간관계는 임시입니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뿔뿔이 헤어지니까요.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결혼해서 아들, 딸 한 명씩 낳아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이었지만 그다지 행복하진 않았습니다.”
1982년에 계장으로 승진했을 땐 해외 파견근무를 지원했다. 돈을 더 벌기 위해서였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10년, 리비아에서 5년을 보냈다. 사방을 둘러보면 사막뿐이었다. 같이 일하는 직원들은 말도 통하지 않는 방글라데시, 태국 등에서 온 이들이었다. 괴로움과 외로움은 술과 담배로 잊었다.
인생의 긴 굽이를 지나 리비아 현장에서 몸과 마음이 넝마가 된 채 돌아온 게 2000년. 그는 집에 돌아왔을 때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몸과 마음은 피폐해졌다. 그 동안 평생을 모은 돈을 아내는 주식으로 탕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입안에 넣은 밥알이 사막의 모래알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이렇게는 더 살 수가 없다.” 김씨는 그때 변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5년이 지난 2005년, 그는 회사에 사표를 냈다. 나이 51세였다. 그는 “초고속 승진까지는 아니었지만 고졸 학력으로 대기업에서 부부장(차장)까지 달았다”며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살았던 삶을 그만하자고 결심하니 모든 것이 홀가분했다”고 말했다.
◇공부에 미친 인생 2막
김씨가 처음 시작한 건 ‘명상’이었다. “화도 가라 앉히고, 밤새 해도 힘 안 들고, 정력에도 좋다”는 친구의 우스갯소리도 있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마음이 컸다. 명상 학원에서는 체조부터 가르쳤다. 몸을 이완시키고 호흡하는 법을 배웠다. 명상을 하고 나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인간은 보통 하루에 6만가지 정도를 생각하는데 그 중 80%가 부정적인 생각이라고 하더군요. 내가 알지도 못 하는 사이에 부정적인 감정을 가득 안게 되는데 명상을 하면서 그런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돼 조금씩 감정을 가라앉힐 수 있게 됐죠.” 차차 명상에 익숙해졌고, 마음 속에는 새로운 미래가 조금씩 그려졌다. ‘나도 남한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가 세운 인생의 첫 목표였다고 한다.
2010년 글로벌사이버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했다. 첫 학기 학점은 4.5으로 만점이었다. 당연히 학과 수석이었다. 2010년 2학기 4.40, 2011년 1학기 4.30, 2학기 4.40, 2012년 1학기 4.30, 2학기 4.00을 받았다. 여름ㆍ겨울 방학에는 빼놓지 않고 계절학기를 들었다.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그 덕에 4년 과정을 3년 만에 조기 졸업했다. 성적은 학과 정원 30명 중 2등이었다. 59세에 받아 든 졸업장이었다.
“이렇게 공부를 하기보단 더 늙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노후자금을 모아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두려움이 들었다. 그는 쉼 호흡을 크게 한번 했다. “이제 수명이 120세로 늘어나서 지금 학위를 따놓으면 그걸로 앞으로 수십 년은 써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 취득에 도전했다. 꼬박 7개월이 걸렸다. 가장 힘든 건 필기시험 합격이 아닌 120시간 실습 시간을 채우는 일이었다. 그는 “120시간을 채우려면 하루에 8시간씩 한다고 해도 보름이 걸린다”며 “생계를 위해 일은 해야 해서 휴무 날인 일요일에만 하느라 꼬박 4개월 동안 한 주도 못 쉬고 일요일에 실습을 나갔다”고 말했다. 실습을 나간 요양원에는 60, 70대 정도의 노인들이 많았다. 김씨보다 고작 10살 많은 노인이 치매에 걸려 대ㆍ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노인이 될수록 뇌를 활용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뇌 분야를 공부해야겠다는 다음 목표는 그렇게 생겼다.
◇환갑에 박사…‘뇌활용 전도사’ 자부심
김씨는 2013년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뇌교육학과의 석ㆍ박사 통합과정에 지원했다. ‘뇌 생리학’ ‘신경 생리학’ 등을 공부했다. 관련 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읽은 책만 대학원 4년 과정 동안 500권이 됐다. 논문 한 편을 쓰는데 꼬박 한 달이 걸렸고, 그가 쓴 논문 중 상당수는 담당 교수에게 ‘게재 불가’ 등의 판결을 받았다. 그래도 꾸준히 썼다. 그러다 보니 벌써 12편의 논문이 각종 등재지에 실렸다.
김씨는 현재 복지회관 등에서 노인들을 상대로 뇌 활용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뇌활용 120세 연구소장’이라는 직함도 달았다. 개인 사무실도 없는 직함뿐이지만 그는 국내 유일의 ‘뇌활용 전도사’라는 자부심을 갖게 됐다. “뇌를 관찰하듯 살아야 한다. 뇌를 자신의 의도대로 쓸 수 있으면 삶이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김씨는 지난해 저서 ‘뇌의 혁명’을 출판했다. 요즘엔 온라인 동영상 공유 사이트인 유튜브에서 방송을 준비하고 있다.
김씨는 “더욱 많은 사람들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가고 있다”며 “스스로를 늙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목표를 정하고 의지를 갖고 실천해나가면 인생에서 못 할 일은 없다”고 말했다. 늦게 배운 공부에, 소중한 자신에 대한 느지막한 깨달음이었다.
천안=김현우기자 777hyunw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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