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스타트업 사장님 3인
지난달 남경필 전 경기지사는 정계은퇴를 선언하면서 “스타트업에 도전하겠다”고 밝혔다. 올해 54세로 오랫동안 정치인으로 살아온 그의 계획은 많은 이들에게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참신한 기술과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한 신생기업을 뜻하는 ‘스타트업’은 보통 20, 30대 젊은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까닭이다.
40, 50대의 창업이라고 하면 프랜차이즈 치킨집이나 편의점처럼 비교적 진입장벽이 낮고 정형화된 자영업을 떠올리는 게 보통이다. 시장 포화로 3년 생존율 40%, 5년 생존율 30%에 불과하다 보니 자영업에는 ‘중장년의 무덤’이라는 을씨년스러운 비유가 으레 따라붙는다.
하지만 우리 주변엔 참신하면서도 연륜이 묻어나는 아이디어와 기술력, 사업계획을 갖추고 창업전선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늦깎이 스타트업 사장님들이 적지 않다. 중소벤처기업부의 ‘시니어 기술창업 지원사업’ 대상으로 선정돼 성공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장연희(48) 꿈과소나무 대표, 이종진(51) 수현테크 대표, 김영선(48) 매직북스 대표의 창업스토리를 들어봤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돈을 벌기 위한 창업보다 자신이 있거나 흥미를 느끼는 분야에서 창업하는 게 중요하다”며 “충분한 사전 준비, 창업 후 3~5년간 버틸 수 있는 자금 또는 자금 마련 방안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쓰나미에 실업자 됐다가 기저귀 사업으로 부활
장연희 대표가 경영하는 꿈과소나무는 성인용 기저귀, 요실금 패드 등 위생용품을 생산하는 업체다. 창업 5년을 맞은 올해 이 회사는 판로 개척에서 잇따라 성과를 내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균일가 생활용품전문점 ‘다이소’와 협의를 거쳐 지난달 납품 계약을 체결했고, 최근에는 홈쇼핑업체 ‘홈앤쇼핑’에 강아지 배변패드 제품을 방송ㆍ판매할 기회를 얻었다. 대형 유통채널을 뚫은 것이다. 장 대표는 “미래 먹거리로 노인, 여성, 애견 관련 용품을 적극 개발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원래 여행사 소속 프리랜서 관광통역사로 일하던 장 대표는 8년 전 인생이 바뀌었다. 매주 한 차례 2박3일 또는 4박5일 일정으로 일본을 오가며 일하던 그는 마흔이던 2011년 3월 일본 도호쿠(東北) 대지진으로 하루 아침에 실업자가 됐다. 관광통역은 그가 30대 전반기를 온전히 바쳐 얻은 직업이었기에 충격은 더 컸다. 대학 졸업 후 도서관 사서, 건설회사 사무직, 학습지 교사 등을 전전하다가 30세부터 4년간 일본어 공부에 매진해 일본 문부과학성의 관광통역사 자격증과 한국관광공사의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어렵게 취득했던 것이다.
수십 여 곳에 아무 응답 없는 이력서를 내기를 6개월, 지인 소개로 기저귀 생리대 등 위생용품 반자재를 제조해 일본에 납품하는 중소기업에 가까스로 취업했다. 어렵게 얻은 일터에서 그는 기저귀나 생리대의 구조, 성분, 관련 전문용어 등을 폭넓게 공부하고, 품질 관리에 철두철미한 일본 거래처 기업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준비된 자에겐 곧 기회가 찾아왔다.
“회사에서 기저귀를 개발하다 사정이 생겨 포기하길래 제가 창업해서 만들겠다고 사장님께얘기했어요. 10여 년 간 일본을 왕래하면서 고령화 문제의 심각성을 절감했고 우리나라 또한 직면할 문제라고 생각했거든요. 특히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늘어나면 가장 필요한 상품이 기저귀라고 생각해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사장의 도움으로 그는 8개월간 회사 창고를 사무실 삼아 창업을 준비했다. 항균 기능과 흡수력을 높여 장시간 착용해도 발진이 생기지 않는 성인용 기저귀 제품을 개발해 ‘빨강내복’이라는 브랜드를 붙였다. 자녀들이 첫 월급을 받으면 부모님께 선물하는 빨간색 내복처럼, 성인용 기저귀 또한 부모님께 드리는 또 다른 속옷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회사를 나와 마침내 2014년 2월 꿈과소나무를 창업했다. 두 달 만인 그 해 4월 첫 매출(600만원)도 기록했다. 그 동안 중간 유통상이나 거래처들과 친분을 쌓아왔던 덕분이었다.
그러나 곧 어려움에 직면했다. 생산제품의 품질은 좋았지만 값이 비싼 게 문제였다. 부모가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장기간 입원하면 약값과 병원비로 지출이 많아 보호자인 자녀들이 기저귀 값에 부담을 느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는 중저가 상품 등으로 제품을 다양화했다. 일본에선 활성화됐지만 국내에선 막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한 요실금 패드도 제작했다. ‘너무 앞서나간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중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 해외시장에 진출해 성과를 냈다.
부단한 노력 덕분에 사업은 자리를 잡았다. 실적도 꾸준히 개선돼 올해 월 매출이 1억원을 넘어섰다. 포기하고 싶었던 때도 많았다는 장 대표를 지탱해준 건 ‘재미’였다.
“일본어 특기를 살려 관련 일을 했다면 좀 더 편한 생활을 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 하는 일은 새로운 과제를 하나씩 해결해가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어 정말 재미있어요. 창업을 준비하는 중장년이라면 그 동안의 경험과 노하우로 즐겁게 오래할 수 있는 일을 해보세요.”
◇자동차 만들다가 ‘대화 가능 귀마개’ 개발
이종진(51) 수현테크 대표는 대학 졸업 후 약 20년간 국내외 자동차 회사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출시 전 차량의 각종 성능을 테스트하는 게 주요 업무였다. 직업 특성상 많은 기계가 가동되거나 운전 중인 자동차 주위에서 일하면서 80데시벨(㏈) 이상의 소음에 노출됐다. 청력 보호를 위해 관련법상 의무적으로 회사가 제공하는 스폰지 소재 귀마개를 착용했지만, 동료 말소리가 안 들리고 전화도 못 받았다. 그렇다고 귀마개를 잠깐 빼놓았다 끼우길 반복하면 곧 기름때에 오염됐다. 이런 불편함 때문에 그와 동료들은 귀마개를 착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차량 센서를 작동하게 하는 주파수를 오랜 기간 분석해왔던 그의 머릿속에 ‘소음은 차단하고 사람 음성만 통과시키는 귀마개를 만들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가 번뜩 떠올랐다. 그렇게 시작된 게 수현테크다.
이 대표는 창업 전 6개월 가량 자료수집, 상품기획, 시장조사 등의 준비를 하고, 지인이나 거래처를 통해 기술 자문을 구할 수 있는 네트워크도 만들어놨다. 특허를 내야 했기 때문에 관련 기술 개발 현황을 조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2014년 10월 회사를 나와 창업했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그는 개인 자금(1억원)과 2015년 12월 기술보증기금에서 벤처기업인증을 취득하고 받은 저리 대출자금(1억원)으로 연구ㆍ개발에 매달린 끝에 2017년 4월 첫 출시작 ‘올톡(All talk)’을 내놨다. 이 제품은 사람 음성의 주파수 대역인 200~4,000헤르츠(㎐) 사이의 소리만 통과시키고 나머지 소리는 차단시킨다. 귀마개에 주파수 분석을 이용한 ‘사운드 필터링’ 기술을 접목시킨 것이 핵심이었다.
반응은 뜨거웠다. 1개당 4만원인 데다 온라인에서만 판매했는데도 제작 물량 1,000개가 6개월 만에 모두 팔렸다. 그는 “시끄러운 환경에서 근무하는 가족이나 친구 등에게 선물하기 위해 구입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결같이 ‘귀마개를 착용한 채로 대화가 가능하니까 정말 편리하다’는 후기가 올라왔다”고 말했다.
회사에는 “사람 음성에 속하는 소음도 차단해달라” “귀마개를 빼지 않고 전화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사용자들의 요구가 쇄도했다. 그는 2018년 초부터 후속제품 개발에 뛰어들어 그 해 12월 시제품을 만들었다. 귓속에 들어가는 메모리폼 재질의 부위에 작은 충전식 칩을 삽입, 회로가 가동되면 사람 음성대역 소리 중 음성과 소음을 구분해내는 디지털 방식의 귀마개를 선보인 것이다. 이 제품은 해외 바이어들의 호평을 받으며 수출부터 됐고 국내에선 인증 절차 등을 거쳐 5월부터 판매될 예정이다.
그는 “처음 완제품을 만들어 낼 때까지 3년이 고비였다”고 말했다. 전 세계에 유사한 제품이 없는 만큼 제품이 완성돼 충분히 알려지면 소음이 심한 공장이나 야외 건설현장 등 상당한 수요가 있을 거란 확신은 있었지만, 실패하면 막다른 길에 내몰릴 수 있다는 두려움도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이 대표 역시 창업을 준비하는 중장년에게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할 것을 당부했다. “단순히 오래 일했던 분야가 아니라 10시간 일해도 힘들지 않았던 일을 하라고 조언합니다. 저는 제품 개발이 재밌었어요. 그저 돈 벌려고 창업했다면 고비였던 초기 3년 사이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는 “기술창업은 제품 연구ㆍ개발 기간이 길어 3년 가량 버틸 수 있는 자금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며 “퇴직을 앞둔 엔지니어에게 회사가 기술창업을 할 수 있도록 배려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장애아 교육 경험 살려 ‘팝업북’ 틈새시장 개척
교육용 팝업북을 제조ㆍ판매하는 매직북스의 김영선(48) 대표는 18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2015년 2월 44세의 나이에 창업했다. 가르치는 것도 보람 있었지만, 교육용 팝업북의 틈새시장을 보고선 과감히 결단을 내렸다.
교육용 팝업북은 ‘책’ 대신 ‘손’으로 직접 만들며 배울 수 있는 학습교재다. 예컨대 선사시대를 공부한다면 신석기, 구석기, 청동기 등 시대별로 다른 집 모형을 직접 만들면서 거주 특징을 알아보고, 조선시대 한양도성 지도에 5대 궁궐과 4대문 모형을 알맞은 위치에 만들어 보는 식이다.
김 대표는 장애가 있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특수교사로 10여 년간 일하면서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좀 더 쉽게 배울 수 있을까’ 고민하다 한 달에 한번씩 팝업북을 활용해 수업을 했더니 아이들이 정말 좋아했다. 책으로 배웠을 땐 금방 잊어버리는 학생들도 수업 내용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등 학습 효과도 뛰어났다.
그러나 수업을 거듭할수록 시중 교육용 팝업북에 대한 아쉬움도 커졌다. “교육용 팝업북을 완제품만 판매하는 업체만 있을 뿐 학생들이 손수 제작할 수 있는 ‘반조립’ 학습교재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회사는 없었어요. 교사들이 직접 만들 수도 있겠지만, 수십명 아이들 분량을 모두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어요. 만약 ‘반조립’ 팝업북이 대량생산된다면 교사도 편리하고 학생도 흥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란 아이디어로 출발했어요.”
그는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2014년 2월 교직을 나와 인쇄, 종이커팅, 포장 등을 1년간 준비한 끝에 매직북스를 창업했다. 특히 제품당 가격을 2,000~3,000원 수준의 저가로 책정해 교육기관의 대량 구매 부담을 대폭 낮췄다. 덕분에 매직북스는 현재 200여 가지의 제품을 전국 유치원 및 초등학교에 학습 교구로 공급하고 있다. 해외 한인학교로도 수출하고 있는데 수출이 전체 매출의 20%를 차지한다.
덕분에 창업 초기 월 50만원 정도에 불과하던 매출은 지난해 연 10억원을 돌파했고, 올해는 월간 1억원을 넘어서고 있다. 사업이 확대되면서 직원도 12명으로 불어났다. 매직북스는 고용노동부의 사회적기업으로도 선정돼 다문화여성, 장애아, 취약계층(도시근로자 평균 소득 60% 이하) 직원들이 일하고 있다. 그는 “매직북스를 국내 최고의 사회적 기업이자 최대 교육회사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경험과 주특기를 살려 틈새시장을 개척해 성공한 김 대표 역시 특기를 살려 창업할 것을 조언했다. “40세가 넘으면 보통 자기만의 특기를 갖게 마련이에요. 저도 직원을 채용할 때 디자인이나 미술에 소질이 있는지, 교육 관련 일을 좋아하는지를 꼭 확인해요. 남들보다 잘 하는 일을 한다면 늦깎이 창업도 문제 없어요.”
박민식 기자 bemyself@hankookilbo.com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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