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회 무능 비웃는 뱅크시 그림 화제
‘국회 무시-결사 저항’ 한국정치 닮은꼴
존중ㆍ소통ㆍ협력하는 의회주의 파탄 위기
‘얼굴없는 그래피티 화가’ 뱅크시가 10년전 작품 ‘위임된 의회’이 최근 영국 브리스톨 박물관에 다시 내걸렸다. 영국하원에 인간의원 대신 100마리의 침팬치가 앉아있는 이 그림은 브렉시트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노’만 외치는 결정장애 의회를 풍자한다. 4개월째 빈손인 우리 국회 모습과 닮았다. /뱅크시 홈페이지 캡처.

지난 달 29일 영국 브리스틀 미술관이 그라피티 아티스트이자 ‘얼굴 없는 화가’로 유명한 뱅크시의 ‘위임된 의회(Devolved Parliament)’라는 작품을 내걸었다. 영국 하원 모습을 담은 이 그림엔 의원들 대신 100마리의 침팬지가 등장한다. 총리로 추정되는 침팬지가 단상에서 뭔가를 얘기하고 고함을 지르고, 여야로 나뉜 나머지 침팬지들은 무력하게 지켜보는 모습이다. 왜 하필 침팬지일까. 화가 눈에는 침팬지가 인간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고집스럽고 소통에 젬병인 동물로 꼽혔던 모양이다.

작품은 10년 전 뱅크시가 그린 것으로 당시도 같은 장소에 전시됐다. 브리스틀 미술관이 이 그림을 다시 꺼내든 것은 이날이 3년 전 실시된 국민투표에 따른 브렉시트 예정일임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다. 하지만 브렉시트는 대안도 없이 오로지 ‘No’ 만 외치는 의회의 무책임 탓에 길을 잃었다. 지금까지 영국 의회는 테리사 메이 총리가 EU와 마련한 브렉시트 합의안을 세 차례 부결한 것은 물론 의회가 직접 만든 8가지 대안도 거부했다. 의회의 무능을 풍자한 ‘침팬지 의회’ 그림이 다시 내걸린 이후 나온 4가지 방안 역시 모두 부결됐다.

나이와 얼굴은 물론 이름마저 불분명한 뱅크시가 SNS를 통해 자신의 작품이 10년 만에 다시 전시된다는 사실을 알린 것은 당파주의가 만연한 영국 의회민주주의의 위기를 꼬집기 위해서다. 자신이 일찌감치 반대편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부추기는 당파적 저질 정치, 곧 ‘침팬지 의회’의 출현을 예언했다는 점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영국 의회는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다 세계의 조롱거리가 됐고 “영국의 자랑인 민주주의가 영국의 수치가 됐다”는 비아냥도 쏟아진다.

브렉시트 논란으로 영국 의회가 묵사발이 됐지만, 치킨게임으로 치닫는 우리 정치의 난맥상 역시 이 그림과 닮았다. 올 들어 여야가 사사건건 대립하며 국회를 팽개쳤으니 “지금까지 이런 정치는 없었다. 침팬지인가, 치킨인가”라는 유행어가 낯설지 않다. 야당 시절 참여정부의 시스템 인사를 자랑하며 국회의 인사청문회 취지를 외면한 청와대의 일방적 장관 임명을 맹비난하던 대통령은 집권 2년 만에 11명의 장관급 인사를 똑같이 강행하면서도 그 흔한 사과 한마디하지 않았다. 청와대 인사검증 라인은 이미선 헌법재판관 후보자의 주식 의혹마저 눈감아 ‘캠코더(캠프, 코드, 더불어민주당)’만 찾는 2류 흥신소로 전락했고, 촛불정부의 정의와 공정을 세우는 ‘만사(萬事)’가 돼야 할 인사는 망사(亡事)가 됐다.

평화와 경제의 새길을 찾다가 미로에 빠진 대통령은 그제 방미에 앞서 4ㆍ11 임정수립 10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며 “국민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가 보장돼야 하며 특권층끼리 결탁ㆍ담합ㆍ공생해 국민의 평범한 삶에 좌절과 상처를 주는 특권과 반칙의 시대를 반드시 끝내야 한다”고 독하게 얘기했다. 그러나 감동이나 공감은 찾기 힘들다.

야당은 어떤가.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엊그제 청와대가 장관 임명을 강행하자 댓바람에 ‘결사의 각오로’ 정권의 오만과 독주에 저항하겠다고 말했다. 지금이 쌍팔년도도 아니고 야당이 소수자나 약자도 아닌데 죽기를 각오한다니… 헛웃음이 나온다. 정치를 기독교 근본주의의 선악 잣대로 나누고, 국민을 공안적 시각의 애국 우파와 종북 좌파로 양분하는 낡은 리더십이 아니면 나오기 힘든 발상이다. 황 대표 발언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이후 한국당은 청와대 앞에서 긴급 의원총회를 열고 막말과 함께 무차별 의혹을 제기했다. 여권의 정책ㆍ인사 헛발질에 따른 반사이익을 어떻게 키워갈지, 30%대로 도약한 국민 기대에 어떻게 부응할지에 대한 전략적 고민은 어디에도 없다.

금주 초 여야 5당 원내대표는 최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이른바 ‘일하는 국회법’에 함께 서명해 정부로 이송하며 ‘실력 국회’로 거듭나겠다고 다짐했다. 그 서명의 잉크도 마르지 않은 지금, 존중과 소통, 견제와 협력의 의회주의 정신을 비웃고 당파성에 불 지르는 침팬지들만 살판났다.

이유식 논설고문 jtino5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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