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월 논의 불구 노사정 합의 실패… EU 압박 수위 높일 듯… 정부 “先비준은 불가”
노사정이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에 끝내 합의하지 못했다. 2011년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으며 한국정부로부터 ILO 핵심협약 비준을 약속 받았던 유럽연합(EU)은 자신들이 제시한 논의시한인 9일까지 합의가 이뤄지지 않자 한국 정부에 ‘조속한 행동’을 촉구하며 압박 수위를 높였다. 한국정부는 1991년 ILO 회원국에 가입했지만 핵심협약(8개) 절반을 비준하지 않은 상태다. 비준하지 않은 협약은 해고자ㆍ실직자의 노조가입 허용 등 단결권 확대가 골자다. 비준이 미뤄질 경우 당장 EU가 분쟁해결 절차를 밟지는 않겠지만 한국의 FTA 위반 문제가 불거지며 국제적 평판이 악화될 수도 있다.
◇노사정 9개월간 논의했지만 합의 불발
정부가 지난해 7월부터 추진한 노사정 ILO 핵심협약 비준 관련 법제도 개선안 논의는 8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부대표급 협상이 실패하며 사실상 무산됐다. ILO 협약을 다룬 경사노위 산하 노사관계제도개선위원회에서 합의가 실패하자 이달 초부터 큰 틀에서 절충이 시도됐다. 하지만 여전히 입장차만 확인된 채 합의가 무산된 것이다.
올해가 ILO 설립 100주년이고, ILO 핵심협약 비준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었기에 어느 때보다 비준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지만 합의 불발은 예고된 결과였다는게 중론이다. 노사정 모두에게 합의를 이끌만한 유인이 없었던 탓이다. 경사노위에서 ‘탄력적 근로시간제 확대’라는 과실을 챙겼던 경영계는 처음부터 논의에 소극적이었다.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려면 해고자, 실업자, 교사 등의 노조 할 권리(단결권)를 허용하는 법 개정이 필요한데, 경영계는 불합리한 단결권 행사에 대처한다는 명목으로 △파업 시 대체인력 투입 허용 △노조의 사업장 점거 금지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 등을 협상카드로 내밀었다. 이는 ILO 핵심협약과 무관한 내용들이다.
경사노위에 노동계 대표로 참여한 한국노총으로서도 협상에 성실하게 합의에 임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협상과정에서 경영계의 요구를 받아들일 경우 노동계의 비판을 홀로 뒤집어써야 할 처지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해고자ㆍ실업자 등의 단결권 확보는 대체로 경사노위에 불참한 민주노총에게 유리한 내용이다.
소극적인 정부와 정치권의 태도도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한 원인이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부가 ILO 핵심협약 비준과 관련 법제도 개선이 얼마나 시급한 일인지를 정확하게 판단해 알리고 노사 합의의 목표점도 제시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여당 역시 뜨거운 감자인 ILO 협약 문제가 정치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고 논의 진전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노사 합의가 어려운 사안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국회 중심으로 논의를 했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최영기 한림대 객원교수(전 한국노동연구원장)은 “국회가 관련 법 개정을 주도적으로 논의하면서 노사 의견을 충분히 듣고 협의할 수 있는 과정을 거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EU 권고안 발표시…한국에게 주홍글씨로
비준 합의가 무산되면서 EU는 한국에 좀더 높은 수위의 압박을 가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EU FTA 제8차 무역위원회 참석차 방한한 세실리아 말스트롬 EU 집행위원회 통상담당 집행위원은 이날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을 만나 “조속한 시일 안에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가시적 진전이 없으면 전문가 패널(소집 절차) 개시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전했다. 면담 이후 기자회견에서 말스트롬 집행위원은 “전문가 패널이 권고안을 내놓으면 양국에 구속력을 갖게 된다”고 덧붙였다. EU는 한국정부가 협약비준 약속을 지키지 않자 지난해 12월부터 분쟁해결절차에 들어갔다. 1단계 절차인 정부간 협의가 성과 없이 끝나자 전문가패널 소집 절차를 개시하겠다는 입장을 구체화한 것이다.
전문가패널 소집까지 가게 되면, 한국의 국제적 평판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우려다. 정부가 대외적으로는 ‘시간벌기’ 협상에 나서면서 대내적으로는 빠른 비준을 끌어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김영한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권고안이 강제성은 없지만 불합리한 노동환경으로 인해 한국 제품이 가격경쟁력을 얻는다는 식의 부정적 내용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며 “궁극적으로는 미국 등 제3국과 협상 과정에서도 우리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때문에 최대한 전문가 패널 소집 단계로 들어가지 않도록 시간을 벌 수 있는 협상에 임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일각에서는 ‘선 비준’ 의견도 나온다. 경사노위 논의에 공익위원으로 참여한 이승욱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FTA 노동조항을 위반해 권고안을 받은 세계 최초 사례가 될 수 있다”면서 정부가 선 비준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부는 위헌 가능성 등을 이유로 선비준은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경사노위는 12일 노사관계제도위 전체회의를 열고 지금까지의 논의 내용을 정리해 국회에 제출하거나 추가 논의를 하는 등 위원회 운영 방안을 정할 예정이다.
진달래 기자 aza@hankookilbo.com
김지현 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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