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대한민국, 둘로 찢겨진 국민
탐욕의 시장경제에 성리학 도덕 잣대
제도적 완충책 없이는 무한투쟁 반복
‘리바이어던’(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다괴물)은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의 역작이다. 17세기 중반 왕당파와 의회파의 대립이 내전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평화를 꿈꿨던 사유의 결과물이다. 그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부르는 정치적 무질서를 극복하려면 ‘국가’라는 괴물이 필요하다고 봤다. 개인의 권리를 양도해 수립된 강력한 국가(공권력)만이 개인의 자유와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에게 국가라는 권력은 안정된 정치질서를 만들어 내는 통일된 집합체가 아니다. ‘힘의 관계가 작동하는 유기체이자 일반적인 전쟁과는 다른 수단에 의해 지속되는 전쟁’이다. 민간인의 평화 바로 밑에서 권력을 위한 싸움이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얘기다. “우리는 타인에 대해 지속적이고 영원한 투쟁 상태에 있다. 그리고 사회를 가르는 전선(戰線)이 형성돼 있다. 전선은 우리를 어느 한 진영에 속하게 만든다. 중립이란 없다. 우리 모두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적이 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은 평화로운가. 평화 밑의 전쟁이라는 암호를 굳이 읽어내려 고민할 필요조차 없다. 푸코의 ‘영구전쟁’ 담론이 적나라하게 벌어지는 곳이 바로 이 나라이니. 보수와 진보 간 이념 갈등은 가히 내전 수준이다. 지지층까지 가세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다. 여야 간 정쟁은 아군과 적이라는 정치적 이분법 수준의 갈등을 진작 넘어섰다. 공존해야 할 적이 아니라 국가 외부의 적처럼 반드시 무찔러 없애야 할 상대다.
보수는 문재인 정부와 그 지지자들을 ‘종북 좌파’ ‘빨갱이’라고, 진보는 자유한국당을 ‘극우 파쇼’ ‘친일 매국노’라고 비난한다. 대한민국 곳곳에서 상대 진영을 죽이기 위한 무한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 정당 언론 사법부 등 국가를 지탱해 온 중심축이 국민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권력자의 통치도구로 전락한 기성 정당은 대의민주주의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고, 신문 방송 등 제도권 언론은 진영에 치우친 불공정 보도를 일삼다 팟캐스트 유튜브 등 대안언론에 상당 부분 자리를 내줬다. 사법부는 소수 엘리트가 법을 사유화하며 정치권력과 재판 거래를 일삼았다.
대중이 권력투쟁에 가세한 데는 정보화 사회의 영향이 크다. 이제 우리 삶은 디지털망에 완벽하게 기록된다. 비밀이란 없다. 언론 정부 정당의 정보 독점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SNS를 통한 다중의 상호작용이 주류 기득권의 권위를 급속히 무너뜨리고 있다. 하지만 분열된 대중은 감성에 휘둘리기 쉽다. 공통의 규칙과 합의를 만들어야 공동체 구성원 간의 싸움을 줄일 수 있다. 공권력의 권위와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예컨대 국회 인사청문회 제도는 무용론이 제기된 지 오래다. 능력과 자질을 점검하기보다 신상 털기에 급급해 정치 혐오감만 부추긴다. 검증기준을 고치지 않는 한 청문회 때마다 되풀이돼 온 악습을 끊기는 불가능하다. 투기 논란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산 증식의 욕망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우리 욕망은 투자요, 상대 진영의 욕망은 투기다. 보유세를 강화해 다주택자를 줄이고 공공임대주택을 늘려 서민 주거난을 해소하는 게 정답이다. 제도 개선으로 풀지 않으면 대중의 질투심을 자극한 투기라는 불경죄로 낙마하는 공직자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국개(犬)의원이라 욕한다고 정치가 정치다워지는 건 아니다. 선거개혁을 통해 지역주의에 기반한 극한 정쟁을 막을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판사 욕한다고 공정한 재판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제왕적 대법원장의 권한을 분산하고 국민의 사법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
갈등은 인간의 숙명이다. 사회가 다양화, 고도화할수록 갈등의 수준도 복잡해진다. 서민 정서나 관행이라는 잣대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정교한 완충장치를 만들어 반대 진영을 공존해야 할 적으로 만드는 게 정당 언론 등 상부 권위체의 역할이다. 어쩌면 우리가 제거돼야 할 증오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한국사회 우울과 불안의 근원일지 모른다.
고재학 논설위원 겸 지방자치연구소장 goind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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