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 대란’ 고성ㆍ속초 가보니]
최초 발화 원암리 폭격 맞은듯… 시민들 “도로에 불 붙어도 발만 동동”
강원 산림 여의도 2배 면적 불타… 고성ㆍ속초 등 5곳 재난사태 선포
“강풍을 타고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르는 불 기둥은 처음 봤어요. 말 그대로 불지옥이에요. 불지옥.”
5일 오전 강원 고성군 원암리 도로의 한 변압기에서 튄 불꽃이 몰고 온 산불이 할퀴고 간 고성과 속초 두 도시는 혈전을 치른 전쟁터나 다름 없었다. 동서고속도로를 지나 고성 토성면에 들어서자 불에 타 뼈대만 남은 버스가 눈에 띄었고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불이 처음 시작된 토성면 원암리는 어둠이 걷히자 처참한 모습을 드러냈다. 초속 20m가 넘는 소형 태풍급 바람을 타고 20여분 만에 마을을 덮친 성난 불길은 마을 주택 50여 채를 순식간에 집어 삼켰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불 폭탄을 피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다 돌아온 주민들은 재로 변한 삶의 터전을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모(75)씨는 “마치 큰 폭죽이 터지듯 불길이 성난 파도같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불꽃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고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전했다.
속초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토성면 용촌리의 한 폐차장은 마치 융단 폭격을 맞은 듯 폐허가 돼 있었다. 차량 100여대가 화마에 녹아 앙상한 골격만 드러냈고, 여전히 잦아들지 않은 바람을 타고 여기 저기서 불씨가 되살아 나기를 반복하는 아찔한 순간이 계속됐다. 텅 빈 폐차장에는 위태롭게 여기저기를 굴러 다니며 언제 터질지 모를 LPG통만이 소방대원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고성에서 발생한 불길이 속초로 번지는 길목에 위치한 용촌리 펜션과 민박 서너 채도 손님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쑥대밭이 됐다. 민박 업주 나갑순(70ㆍ여)씨는 “멀리 보이던 불이 불과 10여분 만에 여러 갈래로 날아와 마을을 덮쳤다”며 “산불과 태풍 등 별일 다 겪어봤어도 이번 같은 불지옥은 처음이었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았다는 안도도 잠시, 화마로 모든 것을 잃어 생업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나씨는 “파죽지세로 달려드는 불을 피해 가까스로 몸만 피했다 돌아오니 모든 게 사라져 있었다. 어디부터 손을 써야 할 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 산불 발화지점인 원암리에서 불과 7㎞ 떨어져 있던 화약창고는 가까스로 참사를 비껴가 주민들이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당시 창고에는 폭약 4,984㎏, 뇌관 2,990발이 보관돼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불이 시작된 지 불과 50여분 만인 지난 4일 8시10분쯤 창고 앞 400여m까지 확산하자 화물차 3대를 긴급 투입, 화약류를 가까스로 외부로 옮겨 대형참사를 면할 수 있었다”고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전했다.
한밤중 불난리를 겪은 속초시 장사동 주민들은 “초속 20m에 이르는 소형 태풍급 강풍에 컨테이너가 날아가고, 불씨를 맞은 참새가 떨어져 죽기도 했다”고 치가 떨리던 당시 상황을 전했다. 장천마을 주민 장모(62ㆍ여)씨는 “불폭탄이 터지 듯 불씨가 동시다발적으로 불을 냈다”며 “불이 시내 도로까지 내려왔으나 진화인력이 없어 끄지 못해 발만 동동 굴렀다”고 말했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이번 화마에 속초 한화리조트와 대조영 세트장, 동해 망상오토캠핑장, 동해고속도로 동해휴게소(동해방면) 등 주요 관광시설도 피해를 입어 벚꽃 성수기를 날려버릴 처지다.
밤새 고성을 지나 속초시내를 덮쳤던 불은 14시간 만인 이날 오전 9시 37분쯤 가까스로 진화됐다.
산림ㆍ소방당국은 날이 밝자 헬기 53대와 1만671명의 진화인력을 투입해 불과의 사투를 벌였다. 확산하는 불기둥을 어렵사리 저지했으나 이미 속초, 고성 주민들은 큰 상처를 받은 뒤였다.
이 불로 서울 여의도 면적과 맞먹은 산림 250㏊가 폐허로 변했다. 지난 4일 밤 고성군 토성면의 한 도로에서 A(58)씨가 잿더미 속에서 숨진 채 발견됐고, 주민 10여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특히 강풍을 등에 업고 이리 저리 날 뛰는 화마로 4,100여명이 황급히 대피했고, 이 가운데 370여명은 삶의 터전을 잃었다.
잔불정리 작업에 들어간 당국은 강한 바람에 불씨가 살아날 것을 대비해 속초와 고성 곳곳에 헬기 4대와 진화인력을 배치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한편 한국전력공사는 당초 변압기 폭발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고성군 원암리 주유소 맞은편 도로변 개폐기 전기선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해당 지점의 변압기에는 폭발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개폐기 자체는 내부에 공기를 차단한 절연 장치라 폭발할 수 없으며, 실제 해당 개폐기가 사고 이후에도 정상 작동하고 있다. 다만 개폐기에 전기를 공급하는 전선은 전도체 성분이 있는 이물질이 붙어 불꽃이 발생하는 일이 종종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성과 속초에 이어 지난 4일 강릉 옥계면 남양리에서 발생한 산불이 5일 오후 4시54분쯤 진화됐다. 소방ㆍ산림당국은 이날 헬기 37대와 소방ㆍ진화대원 7,416명을 투입, 동해 쪽으로 확산하는 불길을 저지했다. 이 불로 밤새 강한 남서풍을 타고 동해시 방향으로 번져 동해고속도로 동해휴게소와 망상오토캠핑리조트 캠핑시설 44곳이 숙대밭이 됐다.
또 무섭게 번지는 불을 피해 5일 새벽 한때 강릉 옥계면과 동해 망상동 일대 주민 400여명이 급히 대피했다. 지금까지 산림 250㏊와 주택 110채를 집어 삼켰다.
이날 강원뿐 아니라 부산 운봉산과 경북 포항, 충남 아산, 경기 고양 등 전국 각지에서 산불이 일어나 산림 피해가 속출했다. 불이 난 지역은 대부분 2, 3일 전 큰 불이 났던 곳으로 대규모 인력이 나서 진화했지만, 강풍과 건조한 날씨에 남은 불씨가 되살아나면서 또 다시 피해가 났다.
정부는 이날 오전 9시를 기해 산불이 난 고성과 속초, 인제, 강릉, 동해에 재난사태를 선포했다. 행정안전부는 이들 5개 지역에 재난안전 특별교부세 40억원과 재난 구호사업비 2억5,000만원을 긴급 지원한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후 강원 고성 토성면사무소에 마련된 대책본부를 찾아 화재수습 진행상황을 보고 받았다. 이어 인근 천진초등학교에 마련된 이재민 임시주거시설을 둘러보며 피해자들을 위로했다. 속초 장사동 장천마을 산불 피해 현장도 둘러봤다.
문재인 대통령은 앞서 청와대 내 국가위기센터에서 긴급회의를 갖고 “현장에 있는 총리와 행정안전부 장관이 상황을 점검해 특별재난지역 지정 검토를 서둘러 달라”고 요청했다.
고성ㆍ속초=박은성 기자 esp7@hankookilbo.com
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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