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들 다 키운 이 집에서 여생을 마치려 했는데 이제 어떡해야 할지….”
5일 엄춘길(77)씨는 망연자실한 눈길과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집을 더듬고 있었다. 늘 드나들던 집인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대야 할 지 모를 정도로 불 타고 무너져 내려앉았다.
전날 밤 강원 고성에서 시작해 속초까지 번진 불길은 순식간에 엄씨 집이 있는 장사동 장천마을을 덮쳤다. 불길이 시작된 고성군 원암리와 4.3㎞ 떨어져 있는 마을이었지만 손 쓸 틈도 없었다. 엄씨는 “산등성이를 타고 산불이 좀 퍼진다 싶더니 바로 아래쪽으로 번지기 시작했고 때마침 강풍이 불어대니 마치 폭격이라도 하듯이 불덩이들이 마을 곳곳에 내려 꽂혔다”고 말했다.
이 집 저 집 지붕에서 불길이 일기 시작했지만 바람이 워낙 거셌다. 강풍이 굉음을 일으키니 대피 방송 소리조차 잘 안 들렸다. 마을 주민들끼리도 어여 대피하란 말이 전달이 안되니 일일이 전화해서 큰 소리로 대피해야 한다고 외쳐야만 했다.
일분일초가 급한 순간이라 가재도구나 가족사진이나 뭐 하나 챙길 틈도 없었다. 엄씨 부부는 옷만 대충 걸치고는 마을 아래 도로변으로 일단 몸을 피한 뒤 시내 친척 집으로 넘어갔다. 다음날 마을로 돌아와 보니 집은 잿더미가 됐다. 감자와 옥수수 농사를 지으며 3남매를 길러낸 집이었다. 엄씨는 “손자들이 오면 뛰어다니고 숨바꼭질을 하며 놀곤 했던 집인데 이렇게 무너져 내렸다”며 “이 집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려 했는데 이제 어찌 살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손주 주려고 따로 챙겨둔 서랍 속 용돈도 재가 되어 있었다.
장천마을 주민들은 비슷한 상황이었다. 장천마을 통장 어두훈(51)씨는 “110세대가 사는 마을에서 집을 잃은 곳이 20세대가 넘는다”며 “농번기가 이제 시작돼 막막함이 더해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대피한 뒤 돌아왔으나 돌아와서 몸 누일 곳조차 마땅찮다. 엄씨 이웃 최영길(76)씨는 “너무 급해서 장화만 신고 대피했다”며 “돌아와보니 농기계, 집 할 것 없이 다 타버려서 뭘 어떻게 할 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집뿐 아니라 상가도 피해가 크다. 강모(51)씨는 발화지점인 원암리 인근 편의점과 식당을 잃었다. 일단 대피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현장에 돌아왔을 때 이미 가게는 다 탄 뒤였다. 피해액은 1억 8,000여만 원에 이른다. 속초 영랑동에서 계란 도매업을 하는 70대 김모씨도 계란 창고 4개 중 3개를 잃었다. 그나마 남은 계란 10만개도 버려야 할 처지다.
맹렬한 불길을 뚫고 가족을 구하려다 안타깝게 사망한 이도 있었다. A(59)씨는 속초 시내에서 산불 소식을 듣자 칠순을 바라보는 누나를 대피시키려 고성군으로 들어갔다. 누나는 구했으나 정작 A씨는 토성면의 한 도로에 쓰러졌다. 경찰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A씨가 숨진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망 원인을 확인 중이다. A씨 유족은 “마음이 따뜻해서 늘 주변 사람들을 자주 찾아가 챙겼다”며 “이웃 주민들도 소식을 듣고는 목놓아 울었다”고 말했다.
산불이 번진 고성군과 속초시 부근은 리조트와 콘도가 몰려 대학생이나 중고등학생들이 단체로 찾는 곳이다. 이 때문에 학생들이 대피도 줄이었다. 경기 평택 현화중학교 2학년 학생 199명이 한 리조트에 머물다 급히 대피했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을 태운 버스에 산불이 옮겨 붙어 전소되는 아찔한 상황도 발생했다. 학생들은 모두 빠져 나와 그나마 인명피해는 없었다. 검도 대회 참가차 고성군의 콘도를 찾았던 중학생 120여명도 무사히 대피한 것으로 확인됐다.
고성ㆍ속초=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이종구 기자 minj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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