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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앵란 “남편 그리워 마른 울음도…유명한 사람과 결혼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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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앵란 “남편 그리워 마른 울음도…유명한 사람과 결혼하지 마”

입력
2019.04.04 18:28
수정
2019.04.04 20:45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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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엄앵란씨가 4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한국영화박물관 신규 기획전시 '청춘 신성일, 전설이 되다'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영화배우 엄앵란씨가 4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한국영화박물관 신규 기획전시 '청춘 신성일, 전설이 되다'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아이고 세상에 어디서 이 많은 자료를 다 구했어. 보고 싶은 얼굴이 여기 있네.”

원로 배우 엄앵란(83)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깃들었다. 눈길이 머문 곳에 신성일ㆍ엄앵란 콤비가 빚어낸 청춘의 찬란한 순간들이 사진에 담겨 전시돼 있었다. 엄앵란은 55년 전 결혼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기가 막힌 신랑이었어.” 한국영화박물관 기획전시 ‘청춘 신성일, 전설이 되다’ 개막식이 열린 3일 서울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을 찾은 엄앵란은 “전시를 둘러보니 눈물이 핑 돈다”며 소회를 털어놓았다.

6월 30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지난해 11월 별세한 고 신성일의 영화 세계를 ‘청춘’이라는 키워드로 돌아보며, 그가 어떻게 영원한 청춘의 아이콘이 됐는지 1960년대 청춘영화 장르와 함께 조명한다. 1960년 ‘로맨스 빠빠’로 은막에 데뷔한 신성일은 ‘가정교사’(1963)를 시작으로 엄앵란과 함께 청춘영화에 출연하며 인기를 얻었고 ‘맨발의 청춘’(1964)을 통해 최고의 스타로 등극했다. 특히 신성일과 엄앵란은 한국영화 최초로 스타시스템, 콤비라는 말을 만들어낼 정도로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1964년에만 27편에 함께 출연했고, 전체 동반 출연작이 58편에 달했다. 신성일이 가장 화려했던 순간에 엄앵란이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영화를 찍으며 사랑에 빠져 1964년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이번 기획전에선 신성일의 출연작 포스터와 영화 스틸 사진, 영상, 유품 등을 다양한 통계와 함께 전시하고, ‘맨발의 청춘’에서 입고 나와 유행이 된 신성일의 가죽 재킷과 청바지, 엄앵란의 더블단추 코트, 극 중 두수(신성일)의 방과 청춘의 해방구인 댄스홀 등을 재현해 꾸며놨다.

영화배우 엄앵란씨가 4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한국영화박물관 신규 기획전시 ‘청춘 신성일, 전설이 되다’에 참석해 딸과 함께 전시관을 살펴보고 있다. 서재훈 기자
영화배우 엄앵란씨가 4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한국영화박물관 신규 기획전시 ‘청춘 신성일, 전설이 되다’에 참석해 딸과 함께 전시관을 살펴보고 있다. 서재훈 기자

개막식에 앞서 만난 엄앵란은 “남편이 유명한 줄은 알았지만 전시회까지 열게 되니 영광스럽고 감사하다”고 운을 뗐다. 신성일이 먼저 떠나고 5개월이 흘렀다는 얘기에 “상당히 오래 전 일 같은데 그것밖에 안 지났냐”고 가볍게 농담도 했다. 웃음 뒤로 회한 어린 세월이 지나갔다. “지금도 저녁 노을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소리 없는 울음이 터져요. 지금 이 양반은 뭘 하고 있을까. 나도 곧 따라가겠지. 가슴이 울컥하면서 흐느끼곤 해요. 그런데 눈물은 안 나와. 55년을 살았으니 정이 깊었나 봐요.”

엄앵란은 신성일과 사랑에 빠졌던 순간을 어제 일처럼 떠올렸다. 철원에서 전쟁영화를 찍을 때였다. 엄앵란이 화약 파편에 맞아 다쳤는데 신성일이 촬영을 중단시키고는 엄앵란을 단숨에 들쳐 업고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고 한다. 엄앵란이 치료를 다 받고서 보니 신성일은 엉덩이에 더 큰 파편을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다. “자기는 다친 줄도 모르고 내 보호자 노릇을 하더라고요.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웠어요. 그래서 내가 좋아하게 됐어요.” 처음 만난 ‘로맨스 빠빠’ 때부터 카리마스와 용맹함이 남다르게 보였다는 고백과 함께 ‘동백 아가씨’(1964) 촬영 때는 “저런 남자와 결혼하면 잘 살겠다는 생각도 했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늘 붙어 다녔어요. 24시간을 4등분 하면서 밤낮없이 바쁘게 촬영했지. 기억나는 영화가 많은데 그래도 최고작은 ‘맨발의 청춘’이에요.”

김수용 감독의 영화 ‘청춘교실’(1963)에 함께 출연한 신성일과 엄앵란.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김수용 감독의 영화 ‘청춘교실’(1963)에 함께 출연한 신성일과 엄앵란.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인기는 폭발적이었지만 영화 배우의 사회적 위상은 요즘 같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딴따라’라는 비하도 따라붙었다. 엄앵란은 “이제는 떳떳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영화, 예술 전공 학생들이 이 전시를 많이 봤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신성일 엄앵란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열심히 하면 누구나 이렇게 잘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어서”라고 했다.

엄앵란은 인터뷰 시작 전 “이젠 숨길 것도 없고, 뭐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이 무엇이었냐고 묻자 화통한 대답이 돌아왔다. “유명한 사람과 결혼하지 마세요. 도통 남편 얼굴을 볼 수가 있어야지. 제작자들이 만날 기다리고,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으니까. 지금 생각하니 그 사람이 불쌍해. 일만 하다 갔어. 어휴, 울면 안 되는데….” 내내 굳건하던 엄앵란이 결국 눈물을 닦았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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