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에서 기사 분량은 여전히 200자 원고지를 기준으로 측정한다. 정작 원고지에 연필로 글자를 적어본 일은 까마득하다. 고등학교 백일장 이후로는 대학 리포트도, 기사도 노트북의 자판을 타닥타닥 두드려가며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수’를 기준으로 글을 셈하는 기자에게, 꾹꾹 종이에 눌러쓴 글이란 어떤 ‘원형’이며 ‘낭만’이다.
한국일보 등에서 전설의 신문기자로 이름을 날린 소설가 김훈의 산문 ‘연필로 쓰기’는 제목 그대로 작가가 원고지에 눌러 쓴 글을 모은 것이다. 연필로 쓴 글이란 모니터 위에 떠올랐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글과는 다른 무게일 수밖에 없다. 오함마를 들고 철거촌을 부수던 지난 시대의 철거반원부터 오늘날 배달라이더에 대한 처우 문제, 국회의원들의 물타기 언어, ‘노인’으로서의 일상에 대한 성찰 등을 담은 글마다 깊은 사유가 찰랑인다. 총 3년 6개월간 200자 원고지 1,156매에 468쪽의 책이 탄생하기까지, 지우개 가루가 책상 위에 산을 이루고 무수한 파지가 쓰레기통으로 쌓였을 것을 떠올리면 한 글자도 허투루 읽을 수가 없다.
연필로 쓰기
김훈 지음
문학동네 발행ㆍ468쪽ㆍ1만 5,500원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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