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회, 나라 만드는 게 정치
큰 정치 사라진 슬픈 자화상
아직 희망 있다고 누군가 답해야
정치란 무엇인가. 우리가 늘 입에 올리고 그 속에서 살고 있지만, 정치를 명확하게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광범위하고 복잡하다.
정치학을 처음 접할 때 나오는 대표적 개념은 ‘가치의 권위적 배분’(데이비드 이스턴),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얻느냐’(헤럴드 라스웰)는 것이다. 권력의 획득과 사용을 정치로 보는 시각도 있으며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비윤리성까지도 용인하는 마키아벨리즘도 존재한다.
느닷없이 정치학 원론에나 나오는 얘기를 꺼낸 이유는 한국 정치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견 차이가 그리 크지 않는데도 타협하지 못하고 죽기 살기로 싸우고, 국민 지지로 뽑혀놓고 서로를 고소, 고발해 자신들의 운명을 검찰에 맡기고,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조차 부인하는 자들이 버젓이 활개를 치고, 상대를 적폐로 규정해 척결을 외치면서 자신들 역시 비슷한 잘못을 범하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왜 정치를 하고 있으며, 정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묻고 싶은 것이다.
국내외 이론이 엄청나게 많지만, 보통사람의 눈으로 정치를 단순하게 규정해보자. 국민들이 등 따뜻하고 배부르며, 나라가 부강하고, 정의가 바로 서고, 기회가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정치 아닐까? 한마디로 좋은 나라, 좋은 사회를 만들어 보자고 갖은 노력을 다해 국회의원도 되고, 도지사 시장도 되고, 대통령도 되려는 것 아닌가?
이렇게 한국 정치가 규정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공의(公義)보다는 사익 추구가, 국가 미래나 공동체 전체를 보는 큰 정치보다는 자기 정파만을 쳐다보는 작은 정치가 더 횡행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지금 여야가 벌이는 진흙탕 싸움을 보면 사익의 관점, 작은 정치의 관점에서 정치를 분석하는 게 보다 타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리 되면 우리도, 정치도, 대한민국도 너무 초라해지지 않을까.
2년 전 개인적으로 큰 정치, 공의의 정치에 대한 기대를 가졌던 적이 있다. 탄핵정국이 정점에 다다른 그즈음, 한 언론계 선배의 상가에서 조문 온 문재인 민주당 의원과 한 자리에 앉아 토론한 적이 있다. 거기엔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도 있었고, 원로 오인환 전 공보처장관 등 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아직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문 의원은 사실상 차기 대통령으로 인식됐다. 김 의원이나 오 전 장관 등 보수 정객들은 여러 주문을 했고 그 핵심은 “통합의 정치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런 당부에 문 의원은 굳은 표정으로 “지금의 시대정신은 적폐 청산”이라고 단언하고 일어섰다. 그가 떠난 자리엔 소명의식으로 좋은 나라를 만들 것이라는 기대, 갈등과 분열이 극심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동시에 교차했다.
2년이 지난 지금 기대는 작아지고 우려는 커졌다. 적폐 청산은 진행되고 있지만, 어디까지 도려내고 어디서 멈출지에 대한 공감대가 없고, 그 엄격한 기준은 집권세력의 과오를 향해 예리한 날의 부메랑으로 날아오고 있다. 그들이 선의로 추진했던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로를 비롯한 소득주도 성장론은 오히려 현실에서는 서민들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뜻은 높고 소명 의식도 있었지만, 실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보수 야당이 믿음을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5‧18 민주화 운동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당내 인사들을 처리하지도 못하고, 성조기를 들고 ‘트럼프 대통령님, 피로써 지킨 대한민국을 끝까지 지켜달라’는 플래카드를 내건 태극기 세력에 기대는 모습은 서글프기까지 하다.
큰 정치, 선의의 정치가 사라진 우리나라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나라가 기울고 있다는 걱정도 크다. 그게 아니라고, 아직 희망은 있다고 누군가 답해줘야 한다. 그런 답을 해줄 의무는 우선 문재인 대통령에게 있고, 황교안 이낙연 유시민 박원순 이재명 김부겸 임종석 나경원 등 다음을 도모하는 주요 정치인들에게도 있다. 그리고 정치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했으면 한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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