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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털터리 된 상속녀, 엄마의 이름으로 통쾌한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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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털터리 된 상속녀, 엄마의 이름으로 통쾌한 복수

입력
2019.04.05 04:40
수정
2019.04.05 14:18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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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의 색'의 전작 '오르부아르’에서 마들렌은 동생 에두아르의 어릴적 일탈을 이해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사진은 '오르부아르'를 원작으로 한 영화 '맨 오브 마스크'에서 마들렌. 영화 캡처
'화재의 색'의 전작 '오르부아르’에서 마들렌은 동생 에두아르의 어릴적 일탈을 이해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사진은 '오르부아르'를 원작으로 한 영화 '맨 오브 마스크'에서 마들렌. 영화 캡처

1차세계대전 직후인 1927년의 프랑스.한때 프랑스경제를 대표했던 은행가 마르셀 페리쿠르의 장례식이 열린다. 그의 죽음보다 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마르셀의 일곱 살 난 손자인 폴이 3층 건물에서 뛰어내린 것.소년은 겨우 살아남지만 하반신이 마비되고, 마르셀의 딸이자 폴의 어머니인 마들렌은 깊은 실의에 빠진다.

이렇게 시작하는 ‘화재의 색’은 프랑스 작가 피에르 르메트르의 장편소설 베스트셀러 ‘오르부아르’의 후속작이다. ‘오르부아르’는 2013년 작가에게 프랑스 최고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안겼다. 프랑스에서 100만부, 한국에서 1만부 판매됐고, 영화 ‘맨 오브 마스크’(2017)로도 제작됐다. ‘오르부아르’에 열광한 독자라면 ‘화재의 색’에도 빠져들 것이다. 사기와 담합, 배신과 음모를 아우르는 팽팽한 서스펜스가 이번에도 압권이다.

‘화재의 색’의 주인공 마들렌은 ‘오르부아르’의 주인공 에두아르의 누나다. 실의에 빠진 것과는 별개로, 마들렌은 거액의 유산을 물려받게 된다. 은행장 귀스타브와 무능력한 정치인 삼촌 샤를은 그를 몰락시켜 재산을 차지할 계획을 세운다. 정부(情夫)인 ‘앙드레’와 하녀인 ‘레옹스’ 역시 저마다의 속셈을 갖고 주변을 맴돈다.

'화재의 색'의 전작 '오르부아르'에서 마들렌은 아버지가 단번에 알아본 악인 프라델 중위와 사랑에 빠지는 인물 정도로만 그려진다. 사진은 '오르부아르'를 원작으로 한 영화 '맨 오브 마스크'.
'화재의 색'의 전작 '오르부아르'에서 마들렌은 아버지가 단번에 알아본 악인 프라델 중위와 사랑에 빠지는 인물 정도로만 그려진다. 사진은 '오르부아르'를 원작으로 한 영화 '맨 오브 마스크'.

마들렌은 아들을 덮친 비극에 허우적대기만 할 뿐,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꾐에 빠져 전 재산을 루마니아 유전에 투자했다가 쫄딱 망해 빈털터리가 되고 만다. 재산과 저택은 고스란히 귀스타브와 샤를, 그리고 하녀 레옹스에게 돌아간다. 무기력한 마들렌은 한 동안 복수를 꿈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아들 폴이 극단적 선택을 한 이유를 둘러싼 ‘진실’을 알게 된 뒤 ‘다른 사람’이 된다. 모든 것을 앗아가고도 염치없이 살고 있는 이들을 향한 치밀한 복수극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오르부아르’에서 마들렌은 악인인 플라델 중위와 사랑에 빠지는 유의 인물이다. ‘화재의 색’에선 180도 변신한다. 어머니로서의 강인한 면모와 더불어, 그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편견을 뒤집는 대범한 면모를 한껏 펼쳐 보인다.

작가가 콸콸 쏟아지는 문장으로 그린 마들렌의 활약을 숨가쁘게 뒤쫓다 보면, 600쪽이 넘는 소설의 결말에 어느새 도착해 있을 것이다. 프랑스 추리작가 협회상도 수상한 작가의 이력이 십분 발휘된, ‘정신없이 재미있으면서도 품격을 잃지 않는’ 소설이다. ‘오르부아르’를 읽지 않았어도 빠져드는 데 문제가 없다. ‘화재의 색’은 작가가 ‘재난의 아이들’ 3부작으로 기획한 시리즈의 2편으로,프랑스 시인 루이 아라공의 시‘라일락과 장미’에 나오는 표현에서 제목을 따왔다.

화재의 색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ㆍ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발행ㆍ624쪽ㆍ1만 4,800원

통쾌한 복수극의 클라이막스를 살짝 소개하면 이렇다. 나약했던 소년과 무기력했던 어머니는 ‘은행업은 여자가 할 일이 아니다’는 편견과 ‘가족 기업의 조타수 위치에 오르기엔 지나치게 어린 아이’라는 걱정을 모두 종식시키고 다시 일어난다. 몰락한 귀족으로 남을 뻔했던 둘은 스스로 삶을 일으켜 세우는 방법을 깨우치고 실행한다. 책은 마들렌의 사적 복수극이기도 하지만, 여자, 소년, 하녀 등 ‘무시당하는 존재들’이 영영 그런 존재로 남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시련을 이겨 낸 마들렌이 하늘에 있는 아버지에게 토해내듯 하는 말은 감동적이다. “그녀는 폴 쪽으로,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한 아이의 목덜미 쪽으로, 그리고 모포 아래 두 무릎이 솟아 있는 그의 다리 쪽으로 눈을 내렸다. 그녀는 어리석지도, 심술궂지도, 못되지도 않았다. 아버지에게 그녀는 대답했다. ‘아빠, 이 일에 간섭하지 마세요! 난 내 방식대로 해요!’”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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