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낱 호르몬 때문에 내 기분이 이렇게 엉망이 된다고?’ 한달에 한번생리 주기에 맞춰 요동치는 기분이 호르몬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말일까 싶었다. 중년의 갱년기에 영향을 주는 건 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 테스토스테론의 변화라는 내용을 접하고도 호르몬이라는 존재를 깊게 탐구해 본 적은 없었다. 호르몬은 실로 그 힘이 어마어마한 존재다. 성장, 대사, 행동, 수면장애, 스트레스, 기분 변화, 수면 주기, 면역, 짝짓기 등에 이르는 인간의 거의 모든 분야를 호르몬이 좌우한다.
미국 예일대 의대와 컬럼비아대 저널리즘대학원에서 강의하는 의사이자 의학 작가인 랜디 허터 엡스타인의 ‘크레이지 호르몬’은 작정하고 호르몬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책이다. 호르몬이 발견되고 명명된 때부터 현재까지 이르는 호르몬의 발자취를 되짚는다.
호르몬을 화학적으로 설명하면 ‘아미노산으로 이뤄진 사슬’이다. 체내 9개 분비샘에서 생성되는 호르몬은 혈액을 통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신체 기관으로 정확하게 운반된다. 신체의 유지와 관리에 필수적인 이 분비액에 호르몬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100년쯤전이다. 영국 과학자 스탈링이 1905년 세계최초로 호르몬이라는 용어를 썼다. ‘흥분시키다’ 또는 ‘자극하다’는 뜻을 가진 고대 그리스어 ‘호르마오’에서 유래했다.
호르몬 연구는 20세기 전반에 걸쳐 활발하게 이뤄졌다. 인류사에 영향을 끼친 비약적 발견과 호르몬을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하는 돌팔이 연구가 공존한 시기였다. 1920년대에는 ‘회춘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정관수술이 유행했고, 1950년대에는 간성으로 태어난 어린 아이의 성별을 정하겠다며 성기를 수술하는 등 호르몬을 오해한 진단과 처방이 많았다. 그런 수많은 시행착오가 쌓여 오늘날의 내분비학에 도달했다.
호르몬 연구사를 짚으며 저자는 여성 과학자의 업적에 굵은 밑줄을 긋는다. 호르몬을 측정하는 방사면역측정법(RIA)을 고안해 1977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로절린 얠로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얠로는 양이 너무 적어 측정할 수 없다고 여겼던 호르몬을 혈액 1㎖당 10억분의 1g 수준까지 측정 가능하게 만들었다. 저자는 “내분비학을 지식에 근거한 추측에서 정밀 과학으로 바꿔놓은 성과”라고 평가했다.
크레이지 호르몬
랜디 허터 엡스타인 지음ㆍ양병찬 옮김
동녘사이언스 발행ㆍ452쪽ㆍ1만9,800원
책은 연구사로 끝나지 않고, 누구나 궁금해 할 만한 호르몬 상식을 이야기 들려주듯 소개한다.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으면 키가 크는지, 폭식을 하는 것이 의지 부족 때문이 아니라 호르몬 문제인지, 범죄를 저지르게 하는 특수 호르몬이 있는지 등이 궁금하다면, 책을 펴 보자. 과학자들의 생생한 일화와 저자의 글맛 나는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과학 책이라는 사실을 잠깐씩 잊게 된다. 독자를 호르몬의 세계로 이끄는 저자의 최종 목적은 ‘흥미’가 아니다. 그는 책에서 배운 호르몬의 역사를 안내자 삼아 약물과 정보에 대한 안목을 갖춘 소비자가 되라고 조언한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