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운 신분증 제시했는데 못 막아, 사고 다음날 다른 업체서 또 빌려
“빨리 차를 달라니까.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하는데, 뭘 그렇게 꾸물거리는 거야.”
지난해 11월 5일 서울 송파구의 한 렌터카 사무실. 박모(30)씨의 재촉과 호통에 렌터카 직원은 허둥지둥 쏘나타 자동차 키를 내주고 말았다. 박씨가 내민 신분증 속 사진 얼굴과 박씨의 실제 얼굴이 언뜻 다른 듯 한편으론 비슷한 듯 헷갈렸지만, 영업해야 하는 ‘을’ 처지인 업체 직원 입장에선 확인이 더 필요하다거나 좀 기다려달라고 하기가 좀 그랬다.
박씨는 이 차를 몰고 나갔다 그날 밤 11시 52분쯤 문정동 도로에서 A(33)씨를 치고 말았다. 서울 친구 집에 놀러 왔다 잠시 담배를 사러 나왔던 A씨는 되돌아가는 길을 헤매다 휴대폰을 보며 길을 찾고 있던 참이었다. A씨는 박씨가 모는 차 보닛에 매달린 채 20여m를 끌려가다 그대로 튕겨나갔다. 충격 당시 추정 속도는 시속 약 50㎞. A씨는 뇌진탕 등 전치 4주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박씨는 “트럭에서 돌이 떨어졌다, 자동차 수리 문제는 좀 있다 하자”며 사고 얘기를 감춘 채 차를 렌터카 업체에 반납한 뒤 잠적했다.
박씨는 이후 전국을 떠돌며 도피 생활을 했다. 경찰은 페쇄회로(CC)TV 등을 분석, 박씨를 뒤쫓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박씨는 이미 무면허운전 사고 등 전과 30범이었고, 수배도 10건 이상으로 주민등록 말소 상태였다. 그러다 지난 3월 35일 충남 보령 대천항에서 해양경찰의 불심검문에 덜미가 잡혀 송파경찰서로 인계됐다. 전과에다 주민등록 말소 상태였던 박씨는 도피 중에 뭘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어선을 탔던 것으로 전해졌다.
조사 결과 박씨는 지난해 경기 안산의 한 PC방에서 주운 지갑 속 운전면허증으로 렌터카를 빌린 것으로 나타났다. 렌터카 업체가 신분증 확인을 소홀히 한다는 점을 이용했다. 심지어 지난해 11월 사고를 낸 다음 날에도 다른 렌터카 업체에서 차를 빌리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 업체 직원 역시 “언뜻 신분증 속 사진과 비슷하게 생겼고, 워낙 빨리 차를 달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급히 내줬다”고 진술했다.
서울 송파경찰서는 추적 넉 달만인 지난 3월말 박씨를 도주치상 및 무면허운전 등 혐의로 구속, 검찰에 넘겼다고 4일 밝혔다. 박씨가 수배된 혐의엔 공갈이나 사기 등도 있어 경찰은 뺑소니뿐 아니라 여죄도 수사할 계획이다. 경찰 관계자는 “신분증 확인을 소홀히 한 렌터카 업체 직원도 처벌하는 방안을 한때 검토했었다”며 “업체도 신분증 확인에 더 신경 써야 한다”고 당부했다.
박진만 기자 bpb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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