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코프먼(1926~2019)
※ 세상을 뜬 이들을 추억합니다. 동시대를 살아 든든했고 또 내내 고마울 이들에게 주목합니다. ‘가만한’은 ‘움직임 따위가 그다지 드러나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은은하다’는 뜻입니다. ‘가만한 당신’은 격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첫 경구피임약 ‘에노비드(Enovid)’가 1960년 5월 세상에 등장했다. 합성 프로게스테론 ‘노르에티노드렐(norethynodrel)’과 에스트로겐의 복합제제인 에노비드는 57년 생리불순 등 여성질환 치료제로 FDA(식품의약국) 승인을 받았지만, 소비자들은 이미 알려진 약의 부작용인 피임(배란 억제) 효과에 더 열광했다. 에노비드는 불과 2년 사이 하루 평균 50만여 정이 소비됐다.
피임ㆍ낙태의 잠재적 저항집단인 가톨릭 신자가 미국 인구의 약 25%였고, 피임 광고가 ‘컴스톡 법(Comstock Law, 1965년 폐지)’이라 불리던 연방음란규제법에 의해 언제든 제제될 수 있던 때였다. 에노비드의 제약사 G.D 썰(Searle)의 경구피임약 출시는 일종의 모험이었지만, 소비자는 62년 120만 명 65년 500만 명으로 폭증했고, 경쟁제품도 잇따라 등장하면서 썰의 시장 독점도 2년 만에 무너졌다. 작가 펄벅이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그 조그만 피임약이 우리 사회에 미치게 될 잠재적 영향은 핵폭탄보다 더 파괴적일 것”이라고 경고하던 1968년 이른바 성 혁명기엔 ‘The Pill’의 혁명적 신세계를 경험한 여성이 1,200만 명에 달했다. Drug(약)이 그대로 마약이 됐듯, ‘The Pill(알약)’이 곧 경구피임약이었다.
최근 출간된 ‘질의 응답’(니나 브로크만 등 지음, 김명남 옮김)의 저자들은 책에서 가장 긴 챕터를 ‘피임’에 할애했다. 저자들은 다양한 피임법의 원리와 효능, 부작용을 상세히 소개한 뒤 ‘호르몬 피임제를 옹호하며’라는 소제목을 단 별도의 항목을 두고 “이런저런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호르몬 피임제는 구리IUD, 불임수술과 더불어 임신 방지효과가 가장 뛰어난 피임법”이라며 “(경구)피임약은 여성이 보다 평등한 권리를 누리도록 해준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발명품 중 하나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저자들이 말한 ‘소문’이란 물론 왜곡되고 부풀려진 부작용이지만, 그건 어쩌면 그 약의 ‘원죄(原罪)’나 전과 탓일 것이다. 60, 70년대 경구피임약은 지금의 약과 달랐다. 초기 에노비드 한 알에는 배란억제 호르몬인 프로게스틴(합성 프로게스테론의 통칭) 10㎎과 비생리기 자궁출혈 증상 등을 개선하는 에스트로겐 0.15㎎이 포함됐다. 근래 경구피임약 함량의 약 10배에 달하는 양이었다. 더 적은 양으로도 피임 효과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썰사는 에스트로겐 0.1㎎과 프로게스틴 2.5㎎, 5㎎으로 함량을 낮춰 FDA 승인을 받았지만, 그건 부작용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원가 절감을 위해서였다.
고용량 피임약의 부작용- 복부팽만감, 구역질, 체중 증가, 성충동 장애 등-은 초기부터 제기됐다. 하지만 당시는 경구피임약뿐 아니라 여성 폐경-갱년기 증상 완화 등을 위해 호르몬 주사-투약 요법이 성행하던 때였다. 산부인과 의사 로버트 윌슨(Robert A. Wilson)같은 이는 에스트로겐 제조사의 후원을 받아 쓴 베스트셀러 ‘영원한 여성성 Feminine Forever’(1966)에 “에스트로겐만 잘 복용하면 50세에도 소매 없는 드레스와 테니스 반바지를 입고 매력을 발산할 수 있다”고 썼다.(wp.2008.2.29)
‘Ladies’ Home Journal’ 등 여성지에 글을 쓴 칼럼니스트 바버라 시먼(Barbara Seaman, 1935~2008)이 의학계와 소비자 등을 상대로 경구피임약과 호르몬 요법의 부작용을 취재했다. 그는 호르몬제제의 부작용이 우울증이나 헛구역질 수준이 아니라 혈전으로 인한 뇌졸중 등의 뇌혈관 질환과 여성 암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견해까지 확인, 1969년 ‘The Doctor’s Case Against Pill’이란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임신 입덧 완화제로 널리 처방되던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가 기형아 출산의 주원인이란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안긴 게 그 무렵이었다. 제약회사 등은 잡지사들에 시먼을 해고하게 하고 원고 계약을 잇달아 철회하게 하는 등 온갖 압력을 행사했다. 그의 책은 경구피임약에 대한 사실상 첫 공식 문제제기였다.
‘지구의 날(4월 22일)’을 창설하는 등 환경과 보건 이슈에 무척 진보적이고 적극적이던 민주당 상원의원 게일로드 넬슨(Gaylord Nelson)의 발의로 이듬해인 1970년 1월 23일 경구피임약 상원 청문회가 열렸다. 3월 초까지 40여일 간 이어진 청문회에는 제약회사와 연구자들, 의료인, 국립보건원과 FDA 등 관련자들이 대거 증인으로 출석했다. 하지만 경구피임약의 소비자인 여성은 단 한 명도, 심지어 청문회의 계기가 된 바버라 시먼조차 증인으로 초대되지 않았다. 그 해 갤럽 조사에서 응답자의 2/3는 의사가 경구피임약을 처방하며 부작용에 대해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 까닭을 두고 미국 공영방송(PBS)은 당시 의사들은, 환자 일반에 대한 태도가 대체로 그러했지만, 특히 여성 환자의 경우 “감정적”이어서 “과잉반응”하고, “쉽사리 남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약의 잠재적 부작용을 알려주는 걸 더 기피했다고 소개했다. 청문회 방청석에 앉은 워싱턴D.C의 페미니스트 단체 ‘D.C. 여성해방’의 젊은 활동가 앨리스 울프선(Alice Wolfson) 등은 왜 여성에겐 발언권이 없는지, 왜 남성 피임약은 없는지 등 잇따른 질문으로, 일종의 필리버스터로, 청문회의 차별에 항의했고, 일부 강제 퇴장을 당하기도 했다. 한 의료인의 발언 즉 “에스트로겐이 암에 미치는 영향은 비료가 밀에 미치는 영향과 같다”는 말에 여성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들은 “우리가 기니피그냐?” “제약사가 이윤을 위해 여성을 살해해온 걸 알면서 지켜봤다는 말이냐”라고 절규했다. 그들은 모두 쫓겨나다시피 했지만, 미국 21~45세 여성 87%가 TV 등을 통해 그 청문회 소식을 알게 됐고, 약 15%가 직후 경구피임약 복용을 중단했다. 넬슨 청문회는 피임약의 안전성 검증을 넘어 여성 보건 및 의료 소비자운동의 분수령이 됐다. 시먼과 울프선 등 청문회장의 주역들은 75년 세계 최대 여성 보건정책 감시 및 건강권 옹호 단체인 ‘미국여성보건네트워크(NWHN)’를 창립했다.
경구피임약을 둘러싼 여성 건강주권의 저 다난한 역사에서 필립 코프먼(Philip Albert Corfman)이 처음 등장한 것도 저 상원 청문회였다. 산부인과 의사 출신의 미 국립보건원 초대 인구연구센터장이던 코프먼은 정회 직후 속개된 청문회 증언대에서 “방금 쫓겨난 여성들이 제기한 몇 가지 문제는 사실 무척 중요하고 유효한 질문”이라고 밝혔다. 그의 그 가만한, 온건하고도 상식적인 말이 그 자리 그 분위기에서는 가히 폭탄선언이었다고 한다. 훗날 울프슨은 “의사가 왕처럼 군림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공감 어린 말 한마디로 청문회장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보편 윤리와 구분 지어 쓰이는 ‘공직자 윤리’란 말은, 조직 자체 혹은 조직 내 특정 집단의 이익을 합리화하는 논리로 변질되기 쉽다. 코프먼은 공직자로서의 기밀 유지 책임보다 보건 정의와 공동체 윤리를 대체로 무겁게 여겼다. 그는 시먼 등에게 여성 보건 관련 주요 연구 자료와 정보를 적극적으로 ‘누설’함으로써 실질적으로 NHWN과 공조했다. 작고 전 시먼은 “코프먼은 우리의 스파이(mole)이자 위장 공작원(inside contact)이었다. 우리는 그를 통해 신뢰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어떤 것에 반대하고 저항해야 하는지 미리 알 수 있었다”고, “그가 없었다면 우리의 여성보건운동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보건 주권운동의 위대한 엑스트라 필립 코프먼이 2월 18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필립 코프먼은 1926년 7월 19일 오하이오주 뵈레아(Berea)에서 태어났다. 미 해군으로 2차대전 태평양 전선에서 복무했고, 오하이오 주 첫 남녀공학 대학 오블린(Obelin) 칼리지와 하버드 의대를 졸업(54년)했다. 대학 동창 유니스 루코크(Eunice Luccock, 80년 작고)와 결혼해 3남1녀를 낳았고, 87년부터 매릴랜드대 인구연구센터 설립자인 인구통계학자 해리엇 프레서(Harriet B. Presser, 2012년 작고)와 32년간 파트너로 지냈다.
그가 대학을 다니던 전후 40,50년대는 미국의 출산율이 인도보다 높던 베이비붐 시대였다. 여성의 경우 고교 졸업 직후나 대학 재학 중 결혼하는 게 보편적이어서 ‘신랑감’을 ‘Mrs. Degree(기혼 학위)’라 부를 정도였다고 한다. 20대 중반에 예사로 자녀 서넛을 둔 여성들은 20년 넘게 남은 가임기를 임신 공포 속에 보내야 했다. 마거릿 생어가 산아제한 운동에 열을 올리고, 베티 프리댄이 ‘여성의 신비’를 쓰던 때가 그러했다.
정부 보건당국과 대학으로서도 인구문제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뉴욕 외곽지역서 산부인과 개업의로 약 4년을 일한 코프먼은 하버드대 메이시(Macy) 펠로십에 선발돼 약 2년간 여성 암을 연구했고, 64년 국립보건원 제안으로 산부인과 파트 컨설턴트가 된 뒤 68년 신설된 인구연구센터 초대 센터장을 맡았다. 그는 피임약 안전성 장기프로젝트 등을 진행했고, WHO(84~87)를 거쳐 FDA 여성 파트에서 98년 은퇴할 때까지 일했다. 한 마디로 그는 6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피임ㆍ산부인과 의약 정책의 실무 주역이었다.
그는 페미니스트였다. ‘Sound Made Public’이란 독립 방송 설립자인 방송인 타니아 케턴지언(Tania Ketenjian)과의 1999년 인터뷰에서 그는 가족 덕에 어려서부터 젠더 의식에 눈을 뜰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할머니는 사내들 못지 않은 말몰이 실력을 자랑하던 여장부였고, 어머니는 전업 주부면서 (어떤 사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유니언 카바이드사 부동산 파트 CEO였던 아버지 연봉의 절반을 벌었고, 아버지 역시 설거지 등 가사에 거리낌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건 소설가 겸 방송작가였던 아내 유니스의 영향이었다. 오벌린칼리지 여자농구팀 선수 출신인 유니스는 여성을 얕잡는 차별적 ‘여성 룰’에 화를 터뜨리곤 했다고 한다. 숨지기 몇 달 전 남편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 축구를 하며 노는 아이들을 구경하느라 멈춰 선 적이 있었다고 한다. “유니스는 그 아이들이 여자애들이란 걸 알고는 너무 행복해하며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고, 코프먼은 말했다. 유니스와 사별 후 만난 동거인 해리엇 프레서 역시 유니스 못지 않은, 맹렬한 페미니스트였다.
공직자로서 그는 고용량 피임약 퇴출과 경구피임약 부작용 안내문(Patient Package Insert) 의무화, NIH의 남성 피임약 연구 지원, 노르플란트(Norplant)와 데포 프로베라(Depo-Provera) 등 진전된 경구피임약 승인과 ‘RU-486’이라 불리는 사후피임약 ‘미페프리스톤(Mifepristone) 승인 등 일련의 과정에 공식ㆍ비공식적으로, 하지만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바버라 시먼은 “수많은 여성 과학자와 행정가가 (공직의 장이던) 그의 도움으로 온당한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고도 말했다.
그가 FDA 산부인과 파트 책임자가 된 건 87년이지만 자문위원으로 일한 건 66년부터였다. 70년 청문회에서 시먼을 처음 알게 된 그는 70년대 중반 어느 날 FDA자문위원회 회의장 복도에서 시먼과 그의 동료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는 FDA 관료들을 설득해 통상 비공개였던 회의에 시먼 일행을 참여시켰다. 이후 FDA 자문회의는 원칙적으로 공개회의로 전환했다. 여성잡지 ‘미즈 Ms’는 창간 10주년이던 1982년 ‘여성운동에 기여한 40인의 남성 영웅’이란 제목의 특집에서 여성보건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그를 포함시켰다.
99년 인터뷰에서 코프먼은 청문회장 발언의 맥락을 이렇게 설명했다. “여성들의 문제 제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무척 중요하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피임약의 안전성은 우려스러운 상황이었고, 여성들은 마땅히 그 정보를 알고 있어야 했다. 온통 남자들뿐인 청문회도 시비 삼을 만했다.”(‘Voices of Women’s Health Movement’ 1권)
코프먼은 2007년 NWHN에 ‘큰 돈’을 기부, 의료전문인 활동가 양성을 위한 인턴십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사별한 아내의 이름을 붙인 NWHN의 ‘유니스 코프먼 인턴십 펀드’는 2008년부터 운영되고 있다. NWHN 사무총장 신디 피어슨(Cindy Pearson)은 “오늘날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하고 안전한 피임법에 관한 한, 코프먼보다 더 많이 기여한 이는 아마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저 초기 여성 피임약 잔혹사와, 더 앞서 호르몬 제제의 피임효과를 검증하는 데 자궁을 내줘야 했던 코스타리카 등 가난한 중미 여성들의 희생을 딛고 경구피임약은 지금도 여성 자유와 해방에 기여한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이라 불린다. 고용량 제제는 80년대 무렵 시장에서 퇴출됐고, ‘질의 응답’ 필자들이 추천한 현재의 복합경구피임약은 프로게스틴 1㎎과 에스트로겐 20㎍ 안팎의 저용량 제제다.
이제 근년의 의료보건 페미니즘은, 사실 70년대 청문회장에서도 제기된 주장이지만, 왜 아직 남성 경구피임약은 없는가, 왜 의료ㆍ제약산업은 남자들이 통제하며 언제까지 여성은 그 결과로서의 의료차별을 감당해야 하는가 따진다. 저 질문들은 의료산업이 여성의 고통을 상대적으로 무시ㆍ경시해 왔다는 엄연한 역사인식 위에서, 페미니즘의 궁극적인 전망과 더불어 긴 세월을 두고 극복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코프먼이 국가예산을 들여 선구적으로 시작했던 남성 경구피임약 연구도, 최근 들어 가시적 성과를 내고 있다. 워싱턴대 의대가 제한적 임상시험을 통해 효능을 확인, 2018년 내분비학회에서 논문(peer-review) 전단계 성과로 공개한 남성 경구피임약 후보물질 ‘DMAU(dimethandrolone undecanoate)’이 있고, 독립 의료연구재단(Parsemus Foundation)이 동물실험에서 효과를 본 뒤 1차 임상시험을 진행중인 가역성 정관 차단물질 ‘바살젤(vasalgel)’이란 것도 있다. 남성용 경구피임약 상용화가 더딘 게 온전히 성차별 탓만은 아닌 듯하다. DMAU 연구 책임자인 워싱턴대 의대 마이클 스키너(Michael Skinner) 교수는 “건강한 남성은 사정 시 약 2억 5,000만 개의 정자를 방출하며 그 중 1/10을 차단해도 수정이 가능하지만, 여성은 매달 1, 2개의 난자만 배란한다. 그건 그야말로 숫자의 문제다”라고 말했다. 요인 경호에 비유하자면, 원거리 저격 포인트 수백 곳을 방비하는 것보다 VIP의 연단 주변을 방탄유리로 막는 게 훨씬 쉽고 성공확률도 높다는 의미다. 물론 편의와 경제성이 윤리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코프먼도 저런 ‘차이’를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99년 인터뷰에서 그는 “더 나은 여성 피임법은 꾸준히 찾아가야 하지만, 내 생각에 더 중요한 것은, 남성에게도 보다 이성적이고 근대적인 피임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최윤필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