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서울의 가장 오래된 빵집 태극당
#프랜차이즈 빵집에 밀려 한때 위기
‘이러다 문 닫겠다’ 창업주 손자들
유학도 포기하고 가게 살리기 나서
#“빵맛 그대로, 낡은 이미지만 깨자”
건물 외관ㆍ샹들리에 옛정취 살리고
한편엔 카페 만들어 4년 전 재개장
#모나카ㆍ샐러드빵ㆍ전병ㆍ버터 케이크
50여년 근속 장인이 만든 빵맛 여전
단골뿐 아니라 젊은 세대에도 인기
유행이 아니어도 한 번씩 생각나는 맛이 있다. 하나만 먹어도 든든한 샐러드빵, 한입 물면 달콤한 소가 입안을 꽉 채우는 단팥빵, 파삭하게 부서지는 과자 속 진한 우유 향을 내뿜는 아이스크림. 1970,80년대 추억을 소환하는 이 먹거리들이 수십 년째 전체 매출의 8할을 차지하는 가게가 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태극당이다. 창업주 신창근씨가 1945년 광복 후 일본인이 운영하던 제과점 ‘미도리야’를 인수, 이듬해 중구 명동에 문을 연 태극당은 1973년 지금의 터인 동대문구 장충동에 자리를 잡았다. 2015년 리모델링을 거쳐 샹들리에, 금붕어 어항 등 태극당의 상징물을 고스란히 살리면서도 세련된 공간으로 재탄생했고, 때마침 뉴트로(New+Retro) 열풍이 맞물리며 빵 마니아들의 ‘빵지순례(유명 빵집을 찾아 다니는 일을 성지 순례에 빗댄 말)’ 필수 코스가 됐다.
“봄가을 서울패션위크 기간에 여기 오시면 되게 재미있어요. 독특하게 차려 입은 단체손님이 한 테이블 앉아있고, 옆에는 40,50대 등산객이 앉아있죠. 한쪽에서는 70대 할아버지가 손주 손잡고 단팥빵 드시고 계세요. 그 옆에 동국대 학생들 있고요. 남녀노소 전 세대를 한 공간에서 볼 수 있는 건 백화점 말곤 드물 겁니다.”
말끝마다 자부심이 듬뿍 묻어난다. 아버지 신광열씨에 이어 3대째 태극당을 운영하고 있는 신경철(34) 전무이사다. 그는 기획, 외부업체 협력 등 태극당의 대내외 업무를 총괄한다. 누나인 신혜명(38·부장), 혜종(36·부장), 혜민(35·주임)씨는 각각 마케팅, 인사, 커스텀 서비스를 맡고 있다.
◇평균 근속 연수 50년의 장인들
‘어쨌든 그 시절에는 일본말로 ‘기레빠시’라는 것을 먹었다. 우리말로 하자면 자투리, 부스러기 정도가 맞을 것이다.(...) 기레빠시는 이렇게 잘라내 못 쓰는 빵을 뜻했다. 모양 때문에 잘라냈지만, 가게에서 파는 카스텔라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그냥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주기에는 모양이 너무 안 좋았다. 결국 기레빠시는 우리 형제들 차지로 돌아왔다.’
김연수의 자전소설 ‘뉴욕제과점’의 한 대목을 들려주니 신혜명 부장이 “저희 어렸을 때도 그랬다!”며 탄식한다. 신경철 전무가 “카스텔라 돌려 깎아서 케이크를 만드니까, 이때 떨어진 부스러기를 아버지가 자루에 이만큼씩 들고 오셨다”고 맞장구를 친다. “그런 빵만 먹은 건 아니지만 그걸 많이 먹긴 했어요. 어릴 적 태극당에 오면 할머니가 항상 1층에서 일하다가 맞아주셨어요. 3층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셨거든요. 아이스크림 하나 물고 내실 들어가는 길에 2층 빵공장을 지나요. 공장장님한테 인사하면 ‘왔어?’하고 반갑게 맞아주셨는데, 지금도 저희랑 같이 일하세요.”(신혜명) 이성길(69) 공장장은 1975년 입사했다. 한청수(79·66년 입사) 김영일 (68·68년 입사)씨와 함께 태극당의 산증인으로 통한다.
이들이 기억하는 신창근 창업주는 “사람들의 감성을 읽어내는 트렌디한 분”이었다. 태극당이 자체 개발한 모나카 아이스크림과 남대문 전병을 출시했고, 1968년 젖소 700마리를 키우는 목장을 세워 순우유 100% 식빵(태극식빵)을 출시하고, 폭발적인 아이스크림 수요를 감당했다. 버터케이크, 단팥빵, 야채사라다(샐러드빵) 등 태극당 대표 메뉴가 이 시절 전부 탄생했다. 2대 사장인 신광열씨는 “아버지 뜻을 한 번도 거스른 적 없는 효자”로 통했다. 가게 인테리어, 빵 진열 방식은 물론 로고인 무궁화와 직원 유니폼에 다는 작은 태극기까지도 바꾸지 않았다. 뉴욕제과, 독일제과 같은 외국 지명을 딴 빵집이 유행했지만 상호 변경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줄서서 먹는 이유? 아는 맛이 무섭더라
신 전무는 어려서부터 ‘태극당 손자’로 불리며 언젠가 빵집을 물려받을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스스로 “거의 놀았다”고 할 만큼 20대 초반에는 힙합과 패션에 빠져 살았다. 제과 제빵을 공부하려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2012년, 마음을 바꿔 가게 돌아가는 것부터 살펴보자며 계산대 업무를 맡으며 충격에 빠졌다. 한때 서울 전역에 퍼져 있던 7개의 지점은 90년대 프랜차이즈 제과점에 밀리며 하나 둘 문을 닫았고 장충동 본점만 남은 상태였는데 카페 매출이 없는 날도 있고, 날씨가 궂으면 빵집 전체 매출이 100만원이 안 나오기도 했다. 단골은 많았지만 열에 여덟이 수십 년간 가게를 찾은 60대 이상이었다. 근처 대학교가 있었지만 젊은 층 발길이 뚝 끊어졌고, 200여 명에 달했던 직원은 30여 명까지 줄었다. “매출이 안 나왔기 때문에 오전에 한가했어요. 공장 올라가서 빵도 포장하고, 카운터 보면서 생각한 개선사항을 적어뒀죠. 다른 오래된 빵집이 어떻게 운영되는지도 살펴봤고요.”
이러다 태극당이 문 닫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가족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생후 7개월인 아이를 돌보던 첫째 누나가 다음날 출근했다. 시련이 연이어 찾아왔다. 2013년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졌고, 한달 후 할아버지가 별세했다. 신 전무는 “유학을 가지 않은 게 신의 한 수였다. 유학 갔다면 제빵 트렌드를 잘 알 수 있었겠지만, 가게 운영을 전혀 몰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심당의 튀김소보로, 이성당의 단팥빵 등 사람들이 오래된 빵집을 찾는 이유는 ‘아는 그 맛’ 때문이란 생각이 스쳤다. 태극당이 잘 할 수 있는 강점이 보였다. 어설프게 신메뉴를 개발하기보다, 모나카 아이스크림, 야채사라다 등 대표 메뉴에 집중하기로 했다.
단 고루한 이미지는 벗어야 했다. 옛 디자인을 보존하되 제 각각이던 포장 디자인과 로고를 통일하기로 했다. 디자인과 마케팅은 ‘미대 출신’ 신 부장이 전공을 살려 맡았다. 1970년대부터 이런저런 포장지에 썼던 무궁화 로고를 깔끔하게 통일했고, 외주 업체에 맡겨 자체 서체인 ‘태극당 1946체’도 개발했다. 새 서체와 로고로 빵 포장지를 바꾼 것만으로도 매출이 두 배로 뛰었다.
다방커피에서 탈피하지 않으면 젊은 고객을 잡을 수 없겠다는 생각에 신 전무는 퇴근 후 바리스타 학원을 다녔다. “우리 규모로는 전문 바리스타를 고용해 직접 로스팅까지 하는 건 무리”라고 결론 내린 후, 백방으로 “핫한 로스터리 카페”를 찾았다. 홍대 일대 입소문을 타고 한남동, 제주도까지 분점을 차린 카페 앤트러사이트의 원두로 낙점했다.
◇뉴트로 성지가 된 태극당
물려받은 유산의 상당 부분을 건물 리모델링에 쓰기로 했다. 1973년 개장 후 40여년간 똑같은 모습을 간직한 태극당 건물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서울의 역사’였지만 접근성이 낮았고 매장 곳곳은 노후화됐다. 고객이 반드시 찾아올만한 매력을 가져야 했다. 2015년 12월 한달 여 공사 끝에 재개장 했다. 옛 것을 그대로 지킨다는 원칙으로 태극당 상징인 샹들리에, 천장과 붉은빛 원목은 그대로 남겼다. 붉은 페인트로 칠한 태극당 간판, ‘납세는 국력이다’ 같은 표어도 제 자리에 두었다. 제빵사들이 밀가루 반죽을 하던 작업대는 2층 손님 테이블로 썼다.
태극당의 옛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한 1층 빵 진열대를 지나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서면, ‘요즘 분위기’의 카페가 나온다. 빵을 카운터에서 꺼내주던 방식에서 고객들이 각자 쟁반에 먹을 빵을 담는 자율 매대 형식으로 바꿨다. 빵과 커피는 따로 계산하는 방식이다. 2층 일부는 카페로 쓰고 2~4층은 빵, 아이스크림, 전병 제작공장으로 운영 중이다. 건물 리모델링을 하면서 생산설비도 싹 바꿨다.
젊은 고객에게 태극당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했다. 패션 브랜드 브라운브레스, 패션 스니커즈 수페르가와 의류, 신발을 공동 제작하고, 26년만에 재발매하는 폴로 랄프 로렌의 ‘윈터 스태디움 리미티드 에디션’ 온라인 쇼케이스를 태극당에서 열었다. 최근 을지로에 문을 연 복합문화공간 ‘아크앤북’에도 입점했다. 신 전무는 “올해 기회가 있으면 두 군데 더 매장을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재개장 3년 만에 태극당은 20대 패션모델과 중년의 등산객, 할아버지 손잡고 온 손주가 함께 하는 ‘뉴트로 문화의 성지’가 됐다. 매출은 2012년에 비해 평균 5배, 평일 대비 7~10배가량 뛰었다. 이제 직원은 50여명, 매장을 보는 아르바이트생까지 합치면 70여명에 이른다.
“제 계획이 있거든요. 5년 후 마흔에는 서울에 지점을 내는 거고, 15년 후 제가 오십이 됐을 때는 해외 지점을 내는 거예요. 제 또래가 70세가 돼 이곳을 찾을 때, 같은 맛을 유지하면서도 고루하지 않는 빵집 만드는 게 목표예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한국적인 빵집이라면 외국인도 사로잡을 수 있을 겁니다.”(신경철)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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