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TV 시트콤 막내 작가 모집 광고를 보고 호기롭게 지원했으나 떨어졌다. 그는 영화제작사를 찾아가 촬영 순서를 정리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 서울 서초구 내방역 인근 사무실로 출근했는데 안이 텅 비어있었다고 한다. 영화제작사 대표가 야반도주한 것이다. 두 달 만에 실업자가 됐다. 재능도, 인연도 따라주지 않는 듯했다.
학원 강사로 돈을 벌며 꿈을 포기하려 했던 2001년, 그는 ‘운 좋게‘ 방송사에 예능 PD로 입사했다. 기쁨도 잠시. 그는 입사 반년 만에 ‘대형 사고’를 쳤다. 청룡영화제 시상식에서 진행자를 제때 무대에 올리지 않아 생방송에 MC석이 텅텅 빈 화면이 수 초 동안 전파를 탔다. 당시 MC는 배우 김혜수와 이병헌. 수습 PD이던 그가 두 사람 대기실에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야 하나, 들어가면 어떻게 인사해야 하나, 군걱정에 사로잡혀 생방송 30초 전까지 두 사람 대기실에 발도 들이지 못한 탓이었다. 정규직 발령도 못 받고 회사에서 잘리는 건 아닌가 싶었다. “모든 걸 용서한다, 서울로 올라와라”라는, 부장 PD의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받고서야 한숨을 돌렸다. ‘1박2일’과 ‘삼시세끼’ 등 숱한 화제작을 낸 나영석 PD는 당시 ‘문제적 신입 사원’이었다.
그랬던 나 PD는 요즘 뭇 회사원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그가 속한 미디어 그룹 CJ ENM이 지난 1일 공시로 나 PD의 연봉(40억원)을 공개하면서다. 나 PD의 연봉이 회사원들 사이 화제가 된 이유는 단지 절대적인 금액이 많아서만이 아니다. CJ ENM에서 받는 연봉으로만 치자면, 그룹 오너인 이재현 회장(23억2,700만원)이나 이미경 부회장(21억300만원)보다 2배 가까이 많다. ‘일개’ 회사원이 그룹의 오너보다 많은 돈을 받다니!
이는 나 PD가 지난해 시청률 20%에 육박한 예능프로그램 ‘윤식당2’를 비롯해 ‘알쓸신잡3’ 등을 성공시켜 케이블 채널 tvN의 브랜드 가치를 올린 결과다. 창의력을 성과로 인정받고, 조직에서 창작자가 존중받은 보기 드문 사례이기도 하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나 PD의 전략이 먹히면서 가능한 변화였다. 지상파 방송사에서 활약하던 나 PD 등이 CJ ENM으로 이적한 2012년 전엔 tvN 예능프로그램 시청률은 1%대를 간신히 넘기는 수준이었다. CJ ENM에서 나 PD가 ‘슈퍼 회사원’이 된 배경이다.
나 PD 같은 슈퍼 회사원이 등장한 건 CJ의 수평적 조직 문화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CJ는 나이와 직급에 상관없이 임직원이 서로 “ㅇㅇㅇ님”이라 부른다. 상대의 직급을 언급하지 않는다. 위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기 위해서다.
하지만 지상파 방송사를 비롯해 대부분 기업의 조직 문화는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다. 북한의 매스게임을 방불케 했던 대기업들의 신입 사원 합동 공연 풍경은 여전히 선명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유행처럼 번졌던 집단화의 광기에 개인의 개성은 무너진다. 통일성을 강요받은 사원에게 혁신을 기대하기 어렵다.
나 PD는 CJ ENM 입사 직후부터 회사와 반대의 길을 갔다. 청춘스타와 새로움에 천착했던 기존 콘텐츠 제작 방향과 달리 노년을 중용하고 보편성을 앞세웠다. 그는 이순재 신구 등 60세를 훌쩍 뛰어넘은 노배우를 데리고 여행(‘꽃보다 할배’ 시리즈)을 떠났다. 톡톡 튀는 리얼 버라이어티 대신 다큐멘터리처럼 하루 세 끼 밥(‘삼시세끼’ 시리즈)을 해 먹는 것만 집중했다. 모두 조직의 틀을 깨서 일군 성공이었다. CJ ENM이 나 PD의 자율성과 개성을 보장해 준 덕분이기도 하다.
회사원이지만 회사와 다른 길을 갈 수 있는 용기와 그걸 포용할 수 있는 조직 문화. 나 PD 같은 슈퍼 회사원이 더 등장하기 위해 우리가 그의 ‘억’ 소리 나는 연봉보다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가 아닐까.
양승준 문화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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