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설경구(51)는 애써 부인하지만 돌이켜보면 운명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영화 ‘생일’(3일 개봉)은 기척도 없이 그를 찾아왔다. ‘박하사탕’(2000)과 ‘오아시스’(2002)를 함께 만든 제작자의 갑작스러운 연락. 당장 만나자는 말에 어리둥절해하며 나간 자리에서 출연 제안을 받았다. 이종언 감독이 어떻게 세월호 유가족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게 됐는지 시나리오에 담긴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에게 주어진 고민의 시간은 딱 일주일. 영화 ‘우상’ 촬영 중이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때였다. “쉽게 거절할 수도 있었는데 제가 그 일주일 동안 ‘우상’ 촬영 일정을 조율하고 있더라고요. 마음을 굳히고 열흘 뒤 ‘생일’ 촬영을 시작했어요.” 세월호 참사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만난 설경구는 “먼 곳에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까운 이웃의 이야기로 느껴졌다”고 했다. 세월호 유가족이 그에겐 ‘이웃’이나 다름없다는 말로 들렸다.
정일(설경구)은 해외에서 일하며 가족과 떨어져 지냈다. 아들 수호(윤찬영)가 떠나던 날에도 그는 가족 곁에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돌아온 그를, 아내 순남(전도연)은 원망하고 딸 예솔(김보민)은 낯설어한다. 설경구는 “정일은 당사자이자 관찰자”라며 “관객의 시선이 정일의 등을 타고 넘어가 순남에게 가닿기를 바랐다”고 했다. “제가 출연 제안받고 처음 물어본 게 ‘전도연에게 시나리오 보냈냐’였어요. 왠지 전도연이 해야 할 영화 같았어요. 이야기 중심은 순남이에요. 마음으로 피를 토하고 있는 순남에게 관객을 잘 인도하고 싶었습니다.”
정일은 아들을 잃었지만 마음껏 아파하지도 못한다.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과 죄의식에 스스로 그럴 자격이 없다고 여긴다. 정일의 숨겨진 사연이 드러나는 장면에서도 설경구는 슬픔을 삼킨다. 어쩌면 순남보다 더한 고통 속에 놓여 있는 사람은 정일일지도 모른다. 설경구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담담하게 표현하려 했다”고 돌이켰다.
‘생일’은 이종언 감독이 2015년부터 경기 안산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만난 세월호 유가족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이 감독이 참여했던 ‘치유공간 이웃’은 아이들 생일이 되면 유독 힘들어하는 유가족을 위해 생일을 기억하는 모임을 마련하고 있었다. 유가족들은 흔쾌히 영화화를 허락해 주고 때때로 속내를 들려주거나 일상을 함께 보내면서 이 감독을 격려했다. 앞서 이 감독은 이창동 감독의 ‘밀양’(2007)과 ‘시’(2010) 연출부에서 일했다.
수호의 생일 모임은 이틀간 촬영했다. 주조연 배우 50명과 스태프 20명이 작은 공간에서 눈물과 웃음을 나눴다. 카메라 3대가 그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30분간 끊지 않고 찍었다. 보강 촬영도 한번 시작하면 15~20분씩 걸렸다. “감독은 롱테이크 촬영을 두 번 했다고 하지만 나는 이틀 내내 찍었다고 말한다”며 설경구가 옅게 웃었다. “그 많은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모이니 묘한 힘이 생겨나더군요. 배우가 보여줄 수 있는 힘이 이런 것이구나 느꼈어요.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정일이 힘겹게 참아 온 슬픔과 그리움을 토해낼 때 관객의 가슴도 무너져 내린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절망 속에 애태웠던 그때 그 마음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정일이 꼭 우리들 같죠.” 설경구가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비볐다. 그는 아닌 척했지만 눈이 젖어 있었다.
2014년 4월 16일, 그로부터 5년.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새살이 돋지 않을지도 모른다. 진심 어린 위로와 애도가 그래서 필요하다. 남겨진 이들에게도 삶은 계속돼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 이르지 않냐는 세간의 우려에 설경구는 이렇게 답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시인은 시로, 소설가는 소설로, 가수는 노래로 추모했어요. 저는 영화인이니 영화로 해야죠.” 그는 “아픔을 치유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위로는 할 수 있다”며 “이 영화가 나를 선택해 줘서 감사하다”고 거듭 말했다.
설경구와 ‘생일’의 만남은 여러모로 운명이다. 실제 그의 생일은 5월 14일. 극 중 아들 수호의 생일도 5월 14일이다. 그저 우연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설경구에겐 특별한 의미다. 매해 생일마다 ‘생일’이 떠오를 테니 말이다. “언젠가 4월 16일을 놓친 적이 있어요. 연도는 알겠는데 순간적으로 날짜가 안 떠오르는 거예요. 내 눈에 꾸준히 보이게 해야겠다 싶어서 모바일 메신저 프로필에 노란 리본 사진을 올려놨어요. 대단한 일은 아니에요. 다만 노력하는 거죠, 잊지 않기 위해서. 관객들도 생일 모임에 참여한다는 마음으로 위로를 나눠 주셨으면 합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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