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29>정태춘ㆍ박은옥
따로 마주해서 엇갈리고 포개진 두 사람의 40년
‘노래 시장’을 떠났던 정태춘·박은옥이 데뷔 40주년을 기해 세상의 부름에 응답했다. 두 사람을 지난달 27일과 28일 각각 서울 마포구의 ‘정태춘 박은옥 40 프로젝트 사업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따로 그러나 같은 포즈로 찍은 두 사람의 사진을 이어 붙였다. 류효진 기자

‘박은옥 정태춘’

남자는 처음으로 둘을 이렇게 적어 보았다. 남자의 이름 다음에 여자의 이름이 뒤따른 지 40년, ‘정태춘 박은옥’은 자체로 고유명사가 됐다. 세상은 종종 이를 ‘정태춘 뒤의 박은옥’ 또는 ‘정태춘 옆의 박은옥’ 나아가 ‘정태춘의 박은옥’으로 해석했다.

그것을 깨고 남자는 여자의 이름을 앞세웠다. 이는 경의의 표현이기도 하다. 음악이 있던 자리를 채워준 붓글(붓으로 쓴 글)로, 여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힘든 길, 긴 여정을 여기까지 함께 왔으니 말로만 감사하는 것은 부족한 고로 허리를 꺾네.”

여자는 의외였다. 자신이 남자를 따르는 존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다. 그녀에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순서에 굳이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았다. “누가 먼저고 나중이 아니라, 우리는 수평으로 있는 거니까요.”

그래도 남자는 미안함이 컸다. 남자가 더 이상 음악을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여자도 덩달아 새 노래를 부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생각했다. ‘내가 아니었다면 자기한테 더 잘 맞고, 더 좋은 곡을 받아 노래할 수 있었을 텐데.’

여자의 마음엔 억울함과 안타까움이 공존했다. 음악을 향한 열정으로 치면 여자도 남자 못지 않았으니. “음악 안 할 거면 재능이라도 나한테 옮겨 줘. 그 재능, 타고 났다고 해서 당신 거 아니야.” 그래도 남자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재미있는 건 이거다. 사실은 첫 만남부터 남자에게 열등감을 안긴 사람이 그 여자라는 것. 여자가 기타를 치며 부른 제니스 이안(Janis Ian)의 ‘제시(Jesse)’는 그에게 충격이고 파격이었다. ‘이런 노래가, 이런 필(feel)이, 이런 가창이, 이런 코드 진행이 있구나…! 나는 그저 아마추어 작곡가에 불과했구나. 대단한 사람이다.’

알고 보면 여자는 일찍이 스타였다. 경남 마산여고 재학시절 그를 모르는 학생이 없었다. 학교 대표로 라디오 방송에서 노래를 부르는 그를 보고 제작진이 말했다. “저 학생 가수 해야겠어.”

그에 비하면 남자는 교무실 문턱을 넘기도 어려워하는 쑥스러움이 많은 소년이었다. 남과 다른 건 자기 만의 세계가 있다는 것. 그렇기에 세상에 건넬 이야기가 많았고, 그것은 노래가 됐다.

노래로 세상의 변혁을 꿈꾼 남자 정태춘(65), 노래로 힘든 이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던 여자 박은옥(62)을 지난달 27일과 28일 만났다. 두 사람을 따로 마주한 건, 그래야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으리라고 생각해서다. 그 남자, 그 여자의 40년은 때로 엇갈리기도 했고, 절묘하게 포개어지기도 했다.

◇청년 태춘의 방황
청년 시절 그는 ‘왜 살아야 하지’라는 실존의 고민에 휩싸였다.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하는 날, 결국 음대 입시 준비를 포기하고 서울을 떴다. 류효진 기자
-음악을 언제부터 시작하게 됐나요?

“초등학교 5학년 때쯤 매형이 가지고 온 기타를 보고 처음 악기라는 걸 접했죠.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타를 가지고 악보를 적기 시작했어요. 배운 바가 없으니 어떤 노래를 듣고 계이름을 적는 식이었죠. 나중에 보니 그게 청음이었어요. 내가 그런 재주를 타고난 모양이에요. 중1 때 제가 그러는 걸 같은 학교 3학년 다니던 형이 보더니, 학교에 현악반이 생기니 거기 들어가라고 했죠. 그래서 바이올린을 배웠어요.”

남자가 현악반에 들어가 바이올린을 잡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교무실에 들어가는 것도 겁내던 중1 학생이, 선생님 앞에 가 “현악반을 하고 싶습니다”라는 의견까지 어떻게 말하겠나. 미적거리는 그를 형이 반 협박조로 강권하며 등 떠밀었다.

“보니까 내가 현악반 첫 학생이었더군요. 그런데 아무튼 바이올린은 내가 제일 잘했어요. 고등학교 때까지 4년간 현악반을 했는데 고3 때 담당 선생님이 갑자기 학교를 떠나면서 현악반이 해체되고 밴드부로 통합됐죠.”

바이올린 전공으로 대입을 치렀지만 실패. 그는 부모와 형제의 지원을 받아 1972년 당시 30만원짜리 ‘이태리제 바이올린’으로 서울대에서 교습까지 받으며 재수를 준비했다.

“위로 형이 넷, 누나가 둘, 아래로 여동생이 하나에요. 내가 일곱 째였는데, 형들도 돈을 모아서 재수를 도와줬죠. 근데 저는 제도적인 교육을 견디지 못했어요. 다른 고민들이 많았죠. 박정희씨가 10월 유신을 발표하는 특별담화를 하는 날 짐을 싸서 악기도 던져두고 형님과 살던 자취방을 나섰죠. 그걸로 정상적인 제도권 진입은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스타였던 소녀 은옥
박은옥씨는 고교 시절 이미 스타였다. 소녀 때도 그랬을 것 같은 미소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류효진 기자

여자는 기타보다 노래가 먼저였다.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 7, 8세 무렵인 것 같아요. KBS ‘어린이 노래자랑’에 나가서 노래 부른 사진이 있더라고요. 중ㆍ고등학교 때도 친구들 얘기로는 화장실에서도 노래를 부르고 있었대요. 늘 노래를 하고 다녔나 봐요. 고등학교 땐 기타 치고 노래 하면서 선배 언니와 듀엣 활동도 했죠. 마산고에 가서 노래도 하고, 외부로 원정 공연도 다녔어요. 전국 고교를 순회하면서 방송했던 유명한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거기에도 학교 대표로 나갔죠. 나중에 편지(팬 레터)도 오고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스타였겠네요.

“학교 내에서는 스타였죠. 하하. 저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기타는 언제 처음 배웠나요?

“어릴 때 사촌오빠들이 드럼도 치고 기타도 치고 그랬는데 그걸 어깨너머로 보고 혼자서 연습했죠. 빨리 늘더라고요.”

-재능이 있었네요.

“좋아하기는 했죠.”

여자도 잠시 바이올린을 잡은 적이 있다. 중학교 때 현악부 활동을 하면서다. 남자도 바이올린을 했지 않았느냐며 신기해 하자, “나는 너무나 잠깐이라 했다고도 할 수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여자에게도 힘들었던 시기가 있다.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이다.

“고3 때였는데 그 날 아침에도 ‘학교 잘 다녀오라’고 하셨는데 학교에 다녀오니 의식이 없는 상태였죠.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편찮으시긴 했지만, 갑작스러웠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한 달 정도 휴학을 했을 거예요.”

◇태춘을 버리고 한수로 산 한 달
방송과 콘서트 무대에 다시 서는 그는 “젊은 뮤지션들에게 통기타 하나로도 서정에서 서사, 사색에서 격정의 노래까지 가능하다는 영감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류효진 기자

짐을 싼 남자는 무작정 기차역으로 가 노선표를 봤다. 멀리 가고 싶었다. 경기 평택이 고향인 그는 충남 천안까지도 가 본 적이 없었다. 밀양이 눈에 들어왔다. 그 길로 표를 끊어 타고 밀양역에 내리니 이른 새벽이었다. 지나는 사람을 붙잡고 일할 곳을 물었고, 한두 다리 거쳐 구한 일터는 목욕탕. 그를 선 보는 주인이 물었다. “이름이 뭐고?” 그때 그의 입에서는 ‘태춘’이 아니라 이 이름이 튀어나왔다. “한숩니다. 정한수.”

-법명이 한수라고 알려졌는데요.

“아니에요. 당시 (소설 ‘백치 아다다’가 원작인) ‘아다다’라는 드라마가 있었어요. 아다다 역이 정영숙씨였고, 못된 남편 역을 김무생씨가 했는데, 그 이름이 한수였어요. 어쩐지 그 이름이 당기더라고요. 그래서 한수라고 소개를 하고 한 달 가량 불을 때고 목욕탕을 청소하는 일을 했죠. 한때 나는 목욕탕의 화부(火夫) 한수였죠. 다시 형님한테 붙잡혀서 밀양을 떠났고 농사 짓다 군대 가고 제대해서 바로 유명한 가수가 됩니다. 하하.”

그런데 찾아보니, 그의 기억에 오류가 있었다. 그 드라마 속 남편의 이름은 ‘유만목’이었다. 이를 말해주니 “40여년간 한수로 알고 있었다”며 무척 놀랐다. 지금은 한수(漢洙)를 호로 쓸 정도로 그에게는 중요한 이름이다.

아직도 생생한 듯 그는 아침마다 자신을 깨우던 ‘한수야, 일어나그라~’ 하던 목욕탕집 주인의 음성을 따라 했다. 목욕탕 화부 자리를 소개 받기 전 들른 밀양 읍내의 술도가에서 본 풍경도 잊지 못하는 듯했다. 맑은 햇살을 받아 술통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던 모습, 코를 찌르던 술 냄새 말이다.

‘밀양의 한수’를 그는 도망자라고 표현했다. “돌파구를 찾아서 떠난 게 아니라 도망 친 거였어요.” 그는 요즘 붓글의 낙관 옆에도 한수라고 적는다. 어쩌면 그 한수의 심정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 어쨌든 태춘으로 돌아온 그는 곡을 쓰기 시작한다.

-군 복무를 하면서 곡을 만든 건가요?

“전투경찰로 경기 고양경찰서 정문 초소에 근무하면서 ‘시인의 마을’을, 인천 해안초소에서는 ‘서해에서’를 만들었죠. 그런 곡들을 들고 레코드 회사에 왔다 갔다 했어요. 그런데 날 전속을 안 시켜주더라고요.”

-음악을 평생 할 거라고 생각했나요?

“전혀. 거기까진 아니었어요. 그러나 다른 생각도 없었죠. 뭐가 되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으니까. 그저 곡만 썼죠. 가수 양병집ㆍ이수만(현 SM엔터테인먼트 회장)씨도 내 곡을 불렀죠. 이수만씨가 부른 ‘한 송이 꿈(원곡 ‘장마’)’은 히트하기도 했고요.”

첫 회사의 사장은 “미스타 정, 이런 거(‘시인의 마을’, ‘서해에서’) 말고 사랑 노래, 사랑 노래~!” 타령을 해 남자는 그 시절 사랑 노래를 많이 만들었다. ‘촛불’도 그 때 나왔다. 남자는 하지만 이후 ‘사랑 노래’들을 다 버리고, ‘촛불’만 남겼다. 회사도 음악평론가 최경식씨의 소개로 서라벌레코드사로 옮긴다.

◇첫 만남, 노래에 충격 받고 목걸이에 ‘별로네’
대중은 흔히 ‘정태춘의 박은옥’으로 인지하고 있을지 모르나, 첫만남에서 실력으로 열등감을 안긴 쪽은 박은옥씨였다. 류효진 기자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자는 부산으로 가 여전히 노래를 불렀다.

-프로필을 보니 부산에서 활동을 한 기록이 있던데요.

“당시 서울의 쉘브르 같은 카페가 부산에도 있었죠. 1년쯤 거기서 노래를 부르고 디스크 자키(DJ)도 했죠. 최백호씨도 그 카페에서 노래를 하다가 서울로 가서 음반을 냈어요. 최백호씨가 저한테 ‘너도 판을 내야 한다’면서 서울로 가자고 했죠. 그래서 서라벌레코드사로 가게 됐어요.”

마침 남자도 가수 데뷔 앨범인 ‘시인의 마을’(1978)이 성공해 MBC 신인가수상, TBC 가요대상 작사부문상을 받았다.

“회사 사장이 출판사를 한 적이 있어선지 ‘시인의 마을’ 같은 노래들을 보고는 파격적인 지원을 해줬죠. ‘책 많이 읽지? 종로서적에 가서 읽고 싶은 책 목록 뽑아봐. 여행도 좀 가야지, 다녀와’ 했죠. 정말 행운이었어요. 그런데 그땐 감사한 줄을 몰랐죠. 그저 서울을 부유하고 있을 뿐이었어요.”

특급대우를 받던 이 서라벌레코드사의 전속 가수는 대표와 함께 여자의 오디션 면접을 함께 봤다. 그게 남자와 여자의 첫 만남이다.

“어느 날 사장이 불러서 방에 들어가니, 박은옥씨, 최백호씨 또 여러 사람들이 앉아있더라고요. 사장이 ‘태춘이가 한 번 들어봐’ 하면서 박은옥씨한테 노래를 시키더군요. 제니스 이안의 ‘제시’라는 노래를 기타를 치면서 부르는데 오!, 코드 진행이 아마추어의 실력이 아니었어요. 이런 고급스런 코드 진행이 있구나 싶었죠. 그 뒤로 박은옥씨에게 내 악보 다 주고 곡을 고르라고 했죠.”

-열등감이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요?

“충분히 가능하죠.”

여자는 남자를 만나기 전 이미 노래로 그를 알고 있었다.

“정태춘씨를 직접 보기 전에 음반을 먼저 들었어요. 정식 음반 출시 전에 ‘시인의 마을’과 ‘아하! 날개여’가 실린 작은 LP판(7인치 LP)이 나왔었거든요. 우리는 그걸 ‘도너츠 판’이라고 불렀는데, 손바닥만한 크기에 두 곡이 들어가는 LP판이죠. 지금으로 치면 싱글 개념인데, 어떤 가수든지 다 내주는 건 아니었어요. 그때는 TV 같은 미디어가 보편적이지 않았으니 음악다방 DJ들의 영향이 막강했죠. 제가 DJ도 했으니 도너츠 판으로 ‘시인의 마을’과 ‘아하! 날개여’를 처음 들은 거예요. 깜짝 놀랬죠. 파격적이어서요. 특히 어떻게 이런 가사를 쓸 수가 있는가 싶었죠. 정태춘씨는 말하듯이 산문 같은 가사를 썼으니까요. ‘이 사람이 누굴까,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생각했죠.”

-정태춘씨가 ‘제시’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하던데요.

“제가 사실 기타를 좀 쳤거든요. 잘 쳤어요. (미소) 데뷔하고 나서도 아마 여자 가수들 중에선 가장 잘 쳤을 거예요. 그에 비해서 정태춘씨는 기타를 잘 치지는 못했거든요. 그러니 인상적이었나 봐요.”

-첫 인상이 어땠나요?

“되게 선해 보였어요. 그런데 목걸이를 하고 있어서 속으로 ‘별로다’ 했죠. 하하. 짙은 노란색 셔츠를 입었는데 동물 모양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하고 있더라고요. 정태춘씨가 있다고 해서 기대를 하고 갔는데.”

-‘시인의 마을’이란 곡과도 분위기가 잘 어울리지 않았겠네요.

“그러니까요. 나중에 물어보니까 그때 남대문시장에 갔을 때 사서 한 번 해봤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얼굴은 선해 보였는데, 나중에 보니 그건 제 착각이었죠. 하하”

-왜, 아니었어요?

“전형적인 예술가라서 자기 고집이 있죠. 음악가로는 존경하지만, 남편으로서는 50점 밖에 못 줘요.”

-정태춘씨가 데뷔 앨범의 곡들을 줬죠.

“골라보라면서 자기가 만든 악보들을 넣은 파일을 주더라고요. 보면 은근히 정리도 잘해요. (미소) 거기서 ‘윙윙윙’, ‘회상’ 같은 노래들을 골랐죠. 그런데 저도 ‘시인의 마을’, ‘아하! 날개여’도 불렀어요. 사실 정태춘씨한테는 데뷔 곡인데 제가 그때는 뭣도 모르고 그 노래들도 부르겠다고 달라고 했죠. 너무 좋으니 욕심이 났던 거예요. 그런데 부르라면서 주더라고요. 정태춘씨도 신인이니까 뭘 모르고 그냥 준 거죠. 하하.”

◇소극장 공연이 알려준 ‘노래하는 이유’
전국 소극장을 돌며 공연했던 ‘얘기 노래 마당’ 시절의 정태춘·박은옥씨. 이 시절을 얘기하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모두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정태춘박은옥40프로젝트사업단 제공

‘언제부터 좋아하게 됐나’, ‘결혼은 어떻게 하게 됐나’, ‘프러포즈는 누가 했나’… 이들이 숱하게 받았던 질문이다. 그런데 답은 이렇다. 여자의 설명이다. “음악을 함께 하다 보니 연대감이라고 해야 하나, 동질감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이 생겼죠. 물론 그것과 연애 감정은 별개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이상하게 낯선 사람이 아니고 오래 전부터 봐온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1980년 이들은 ‘조금만 더 하면 자리를 잡을 테니 기다리라’며 말리던 소속사 대표의 주례로 결혼했다. 각각 3집, 2집까지 단독 앨범을 냈던 남자와 여자는, 지구레코드사로 옮겨 ‘정태춘 박은옥’으로 앨범을 내기 시작했고 4집 ‘떠나가는 배ㆍ사랑하는 이에게(1984)’, 5집 ‘북한강에서ㆍ봉숭아’(1985)가 잇따라 크게 성공했다.

그런데 의외의 사실. 두 사람의 듀엣 곡은 ‘사랑하는 이에게’ 하나뿐이다. 다른 곡들은 두 사람 중 하나가 화음을 넣어주거나 1, 2절을 나눠 부른 정도였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에게’는 두 사람이 교제하던 시절 여자가 노랫말을 썼고, 남자가 곡을 붙였다. ‘그대 고운 목소리에 내 마음 흔들리고 나도 모르게 어느새 사랑하게 되었네’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이후로도 많은 연인들의 주제가로 불렸다.

이들의 곡이 인기를 얻자 회사는 돈을 벌었지만, 4년 계약에 달랑 전속금 800만원을 받았던 이들은 정작 성공을 실감하지는 못했다. 결국 재계약을 하지 않고 스스로 레이블을 만들어 음반을 냈다.

무대도 방송에서 소극장으로 옮긴다. 2년간 전국의 소극장을 돌며 했던 ‘정태춘 박은옥의 얘기 노래 마당’이 그것이다. 두 사람이 어쩌면 노래로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아닐까. 이들은 ‘좋았다’는 말을 이 대목에서 가장 많이 했다.

남자의 기억이다. “우리가 만들어 낸 공연이 ‘얘기 노래 마당’이었죠. 무슨 쇼니, 콘서트니 하는 것도 그 때는 낯선 말이었어요. 가수는 리사이틀 밖에는 없었는데 우리가 소극장 공연을 기획한 거죠. 관객이 200, 300명쯤 앞에 앉아 있고 공연하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니 우리한테는 정말 좋은 무대였어요. 그때 들었던 말 중에 ‘우리나라 소는 얼룩소가 아니라 누렁소인데 왜 동요는 얼룩소라고 배울까요’예요. 그래서 이후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누렁 송아지)라는 타이틀로 공연(노래극)을 하기도 했죠.”

여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TV 방송 활동을 하지 않으니까 많이들 궁금해 했거든요. 200석 조금 넘는 소극장에서 기타 두 대 갖고 노래하고 중간중간 관객에게 뭐든 말씀 하시라고 했죠. 궁금한 거 물어도 좋고, 비판도 좋다고요. 그렇게 얘기를 주고 받으며 노래했어요. 아마도 최초의 토크 콘서트가 아니었을까요? 무척 재미있었고, 따뜻했죠.”

◇집안의 은옥, 운동장의 태춘
정태춘씨가 노래로 든 첫 깃발은 정부의 가요 사전 심의제 폐지였다. 그는 기자회견까지 열어 사전 심의를 받지 않고 비합법 음반을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정태춘박은옥40프로젝트사업단 제공

딸 새난슬(싱어송라이터이자 일러스트레이터)씨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두 사람은 다른 궤도로 접어들었다. 여자는 육아에, 남자는 집회에.

“딸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지방 공연을 가도 데리고 다닐 수 있었어요. 유치원은 빠져도 되니까. 하지만 학교는 그럴 수 없고, 그렇다면 누군가는 육아를 맡아야 했죠. 보다 재능 있는 사람이 음악 활동을 열심히 하도록 하고 저는 아이를 키웠죠. 그것도 나한테는 소중한 일이니까요. 그래서 6년 가까이 활동을 쉬었어요. 그런데 그때 정태춘씨는 노래의 무대가 바뀌었죠.”

남자의 새 무대는 운동장이었다. 1988년 청계피복노조가 일일찻집 공연을 요청한 게 작은 계기였다. 남자는 이 시기, 가수로서 다시 태어났다고 여긴다.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가 결성돼서 해직, 투옥 교사들이 농성을 하던 때였어요. ‘함께 합시다’ 해서 이번에는 소극장이 아니고 전국 대학 운동장을 돌았죠. 전교조, 대학 총학생회와 결합해서 아주 선동적인 대단위 야외 공연을 했어요.”

1989년 노래극 ‘누렁소’의 18개 전국 대학 순회 공연이었다. 이 공연은 ‘이 나라 소는 누렁소제 얼룩소가 아니여, 그 놈의 얼룩소가 머잖아 우릴 잡아먹을 것이여’라는 독백으로 시작한다. 서울 연세대에서 열린 10차 공연에서 이미 관중이 8만 명을 넘어설 정도로 지지를 받았다.

-집회 분위기였겠네요.

“거의 집회였죠. 전교조를 지지하는 메시지에 민족주의적 색채, 거기다 반미(反美)까지 담고 있었으니까요. 거기서 나는 환골탈태했어요. 조용히 서정적인 노래를 부르던 가수에서, 운동장에서 외치는 가수로 거듭난 거죠.”

-노래의 의미도 달라졌나요?

“그 전까지 노래는 내 사적인 일기였어요. 개인적인 상념에 머물러 있었지 나를 둘러싼 환경에는 무관심했죠. 환경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데도, 나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착각하고 산 거예요. 초창기 노래인 ‘시인의 마을’, ‘떠나가는 배’, ‘북한강에서’ 이런 노래들은 다 떠나는 노래거든요. 현실에 편히 적응하지 못하는 자의 방황이었죠. 그런데 그게 뒤집어진 거예요, 떠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이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신념이 내 안에 세워지기 시작했죠. ‘이거 아니야’ 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줄줄줄줄 나왔어요. 나는 앞으로 어떤 가수가 되겠다는 계산도 없이. 내가 변화하고 그 변화에 걸맞은 노래들이 나온 거예요.”

-노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요?

“노래가 큰 힘이 될 수 있겠구나, 노래가 무기가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그런 변혁의 의지를 담은 노래들이 내 안에서 나온 거죠. ‘아, 대한민국’(7집ㆍ1990)이 그런 노래가 집약된 앨범이에요.”

이 앨범으로, 그는 사전 심의 철폐 투쟁의 깃발을 든다.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음반법)에 따른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 심의를 거부하고 비합법 발표를 택한 것이다. 그리고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의 가요 사전 검열제 폐지’를 요구했다. 정부가 고발하면,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 제청 신청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당시 노태우 정부는 조용히 지나갔다. 앨범은 카세트 테이프로만 발매됐다. 법은 바뀌지 않았고, 3년이 흘렀다. 새 앨범 ‘92년 장마, 종로에서’(8집ㆍ1993)를 낼 때 그는 다시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영삼 정부는 고발했고, 그는 위헌 제청 신청으로 맞섰다. 1995년 말 헌재의 위헌 결정이 나오기 전 국회에서 가요의 사전 심의를 폐지하는 음반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이듬 해 ‘아, 대한민국’ 앨범도 합법 CD로 다시 냈다. 6년에 걸친 투쟁의 승리였다.

◇깃발 든 태춘의 관객이 돼주다
박은옥씨는 정태춘씨가 노래로 변혁을 꿈꾸기 시작한 때에도 그의 광장을 찾아 다니며 지원했다. 류효진 기자

여자는 노래로 깃발 드는 남자가 낯설었다. 혼자서 아이를 키우던 여자에게 남자가 다니는 공간은 전혀 모르는 세계였다. 그 세계로 남자 혼자만 가게 둘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왜 저런 곳에 가서 노래를 하지’ 했어요. 두고 보기만 하다가 안 되겠더라고요. 이러다가 점점 이 사람을 이해하기 어려워질 것 같았어요. 그래서 주말에 딸이 학교에 가지 않을 때는 딸을 데리고 정태춘씨가 서는 집회에 갔죠. 열심히 관객이 된 거예요.”

-가서 보니 어땠나요?

“그때는 어쨌든 다 함께 하나가 되는 게 중요하니까, 노래도 딱딱 맞아 떨어지는 행진풍의 노래라야 하잖아요. 그러니 ‘시인의 마을’로 되겠어요? 처음엔 부르는 노래들이 낯설더라고요. 근데 사람은 뭐든지 금세 익숙해지게 돼있잖아요. 그러면서 나도 자기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서 투신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았죠.”

-그 시절 정태춘씨의 노래도 바뀌었죠.

“현실의 문제를 은유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우리들의 죽음’이라는 곡이 있어요. 한겨레신문에 난 작은 기사를 보고 만든 노래예요. 제가 그랬어요. 이렇게 아픈 사연을 노래로 들으면 더 고통스럽지 않겠느냐고. 그랬더니 그러더군요. 누군가는 얘기해야 하는 일이라고.”

‘우리들의 죽음’은 기사를 그대로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 ‘맞벌이 영세 서민 부부가 방문을 잠그고 일을 나간 사이, 지하셋방에서 불이나 방 안에서 놀던 어린 자녀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질식해 숨졌다. 불이 났을 때 아버지 권씨는 경기도 부천의 직장으로 어머니 이씨는 합정동으로 파출부 일을 나가 있었으며, 아이들이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방문을 밖에서 자물쇠로 잠그고, 바깥 현관문도 잠가 둔 상태였다…’

딸이 대학에 들어가고, 여자는 엄마에서 가수로 돌아올 준비를 한다. 그런데 이번엔 남자가 더 이상 노래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유를 물었나요?

“그 사람 속은 알죠. 24시간 함께 있으니까. ‘당신은 안 불러도 내 노래는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한 번에 거절 당했죠. 너무 서운하더라고요. 그간 헛살았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그러더군요. ‘나는 노래로 내 얘기를 하는 사람인데 할 말이 없으면 만들지 못한다’고. 그 다음부터는 노래 만들어 달라고 하지 않았죠.”

◇“나는 패잔병” 다시 한수로
정태춘씨는 “시장의 매커니즘에 적응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며 “내 속에서 나오는 말을 할 수 있는 다른 도구가 있다면 굳이 노래를 만들지 않기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새로운 도구는 붓글이다. 정태춘박은옥40프로젝트사업단 제공

남자는, 왜 노래 짓기를 접었을까.

“(2000년에 접어들면서) 기득권의 구성은 조금 바뀌었을지 몰라도 사회 공동체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거든요. 차별과 분열, 독점과 소외의 문제는 전혀 변하지 않은 거죠. 1997년 말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이 시작된 이후 한국이라는 경제 혹은 정치 단위는 세계의 일부가 됐어요. 구자본주의가 무너지고 신자본주의가 등장했죠. 나는 자본주의를 산업주의라고 불러요. 새로운 문명의 타이틀이 산업주의가 된 거죠. 시장을 위해 국가가 기능하고, 시장이 모든 걸 장악했잖아요. 나는 이기지 못한 거예요. 그러니 나는 나를 패잔병이라고 봐요. 다시 싸울 수도 없고 승자의 편도 아니고.”

-패잔병이요?

“내가 바라던 세상이 오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사회 변혁을 꿈꿨죠. 인간이 인간을 대접하는 방식을 놓고 보면 현재 산업 문명의 윤리성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어요. 그걸 부수려고 싸웠는데, 이기지 못했고, 싸움은 끝났고… 그럼 나는 뭐냐 패잔병인 거죠.”

-노래에 힘이 없다고 결론 낸 건가요?

“변혁이나 저항의 훌륭한 도구였죠. 그 기능이 떨어졌다기보다는 사람들의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사람들이 문제 제기에 거리를 두기 시작했으니까.”

-그렇다고 음악을 아예 접은 게 잘 이해되지 않아요.

“음악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아요. 그렇지만 음원으로 완성시키는 데는 적지 않은 돈과 시간이 들어가죠. 시간으로는 적어도 1년, 돈도 최소한 5,000만원은 들여야 발표를 할 수 있죠. 그 전의 앨범이 많이 팔려 수익이 생겼다면 투자할 수 있겠지만 한두 번 실패 하고 나면 다시 시작하기가 겁이 나죠. 창작 의욕도 떨어지고요.”

9집 ‘정동진ㆍ건너간다’(1993년), 10집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2002년)가 그랬다.

“나름대로 시기마다 내 고민,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았고 음악적으로도 정성을 다해 만들었지만 두 앨범 모두 피드백이 없었어요.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죠. 화가 나기도 했고, 내가 고립되는 느낌도 받았죠. 그럼에도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었으니 생업을 완전히 포기할 수도 없었어요.”

우울한 시기를 보낸 그는 붓글을 새로운 소통의 도구로 삼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붓으로 써내려 간 글이라서 붓글이라고 부른다. “개인 블로그에는 계속 올려왔죠. 하루 20, 30명 정도가 다녀가는 정도의 소통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근래에는 글씨를 쓰고, 글씨로 쓸 글들을 다듬는 게 가장 행복한 일이에요.” 그의 붓글 중에 ‘노래’라는 작품이 있다. ‘마음으로 부르지 목이 부르나’라는 내용이다. 그는 “붓글도 손은 도구일 뿐 결국 마음으로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박은옥씨 위한 앨범은 하나 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어요. 막았던 둑을 여니까 줄줄줄 또 내 안에서 노래들이 나왔죠. 내 속마음을 다시 내놓고 싶지 않았는데 안되더군요. 박은옥씨가 ‘이건 당신한테 더 잘 맞으니까 부르라’며 내게 밀친 곡들이 많았지만.”

남자가 고립, 우울, 행복의 시간을 거치는 동안 여자는, 그저 그의 곁에 있었다. “초청 공연은 계속 다녔지만, 정태춘씨가 곡을 쓰지 않으니 새로운 노래는 부르지 못했죠.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의 노래를 받을 수도 없고요. 2002년에 이제 더 노래를 만들지 않겠다고 하더니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는 갑자기 ‘내가 당신 마지막 앨범은 해줘야겠다’고 하더군요. 저러다 말겠지 했는데, 두 달 새 8곡을 만들더라고요.”

2012년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앨범이 그렇게 나왔다.

-정태춘씨가 노래를 만들지 않는 동안 새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았나요.

“오히려 그런 마음보다 정태춘씨가 재능을 닫아 버리는 게 안타까웠어요. 그 재능으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나 또한 정태춘의 팬이니까요. 저렇게 마음을 다쳐서 노래를 만들고 싶어하지 않으니. 참 뛰어난 재능을 가진 예술가지만 개인적으로는 별로 행복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죠. 본인이 고단하잖아요. 행복하게 단순하게 살았으면 좋겠는데.”

그 말에 단순하게 살고 있는지를 물었더니, 단박에 환한 미소로 응답한다. “저는 단순해요! 늘 감사한 걸 찾으려고 하죠.”

◇“은옥이 없었다면 살아있을까”
정태춘·박은옥씨는 서로에게 경의를 잃지 않은 동지이자, 부부다. 사진은 사전 심의제 폐지에 불을 댕긴 6집 앨범 ‘92년 장마, 종로에서’ 재킷에 실린 사진. 한국일보 자료사진

두 사람에게 자신과 상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먼저 남자의 답.

-박은옥은 어떤 사람인가요?

“누굴 보살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죠. 그래서 어떤 때는 박은옥씨 아니었으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나는 굉장히 위험한 부분도 있고 앞으로 마구 나가려고 하는 사람이었는데.”

-가수 박은옥은요?

“특별한 개성을 지닌 가수죠. 그런데 더 잘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곡들을 못 받았어요. 내 노래만을 부르다 보니까. 그런 면에서 박은옥씨의 개성을 충분히 살려주는 곡을 만들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요.”

-정태춘은 어떤 사람인가요?

“나는 뭐… 보잘것없는 사람이죠. 여러모로, 그렇습니다.”

-남편 정태춘은요?

“그건 뭐, 더 형편 없고요. 다정다감하지도 못한데다, 나는 혼자 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가수 정태춘은 어떤가요?

“이상주의자인데, 누군가는 나를 좌충우돌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명랑한 삶을 살지 못한 사람이고요. 개인적으로는 낙관적인데, 세상과의 관계가 그런 면이 있었죠.”

◇“태춘의 음악은 사람을 움직여”
다시 콘서트를 준비하는 정태춘·박은옥씨. 데뷔 40주년 콘서트 ‘날자, 오리배’는 13일 제주를 시작으로 6월까지 이어진다. 하반기에도 또 한 차례 순회 콘서트가 예정돼있다. 정태춘박은옥40프로젝트사업단 제공

이번엔 여자의 말이다.

-정태춘은 어떤 사람인가요?

“어른들이 예술가와는 결혼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하. 자기 세계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죠.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창작하는 사람이니 집중해서 자기에게 빠져 있는 시간이 필요하구나 생각을 바꿨어요. 남편으로서는 50점 밖에 안되죠.”

-가수 정태춘은요?

“물론, 말할 것도 없이 100점이죠. 아니, 그 이상이죠. 그저 노래만 부르는 사람이 아니니까.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하잖아요. 글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인데, 그 사람에겐 그런 큰 무기가 있죠.”

-박은옥은 어떤 사람인가요?

“저도 저한테는 50점 밖에 줄 수가 없어요.”

-정태춘씨가 말하길, 주위 사람을 정말 잘 보살펴준다고 하던데요.

“그건 밖에서 하는 멘트고요. 하하. 집에 있을 때는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마’라는 식이죠. 남편과 아내는, 자기가 싫어하는 자기 모습도 보여주는 존재니까 둘 다 마찬가지겠지만요.”

-가수 박은옥은요?

“그건 제가 평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나는 음악 한다는 게 무척 행복한 사람이죠. 음악은 아직도 저를 너무나 설레게 하는 장르예요. 다시 태어나도 음악 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근데 단지 정태춘씨처럼 재능이 많기를 바라죠. 재능이 없으니까 누군가를 위해서 노래 만들어주고 싶을 때 그러지를 못해 제일 답답해요. 작년 말에도 세 살짜리 아기를 데리고 스스로 바다에 들어가 죽은 젊은 엄마 기사를 읽고 몇 날 며칠을 울었어요. 죽으러 가는데 그러면서도 아기가 추울까 봐 이불로 싸 안고 간 그 엄마의 마음을 다른 사람은 도저히 알 수가 없죠. 그들을 위해 뭔가 해주고 싶은데, 아니면 그냥 이렇게 잊히고 말 텐데... 속상하고 답답했어요.”

눈이 순식간에 붉어지더니 양 볼에 눈물이 흘렀다. 왜 여자가 음악은 행복할 때가 아니라 힘들 때 조용히 옆에 다가와 손을 잡아주는 친구 같은 존재라고 여기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노래를 통해 위로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우리 노래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아마 정태춘씨는 이러겠죠. 위로만 해서 뭐하냐고 바꿔야지. (웃음)”

◇올 한해 재미있게 놀아보자
‘정태춘·박은옥’, 한국 음악사에 이름 자체로 장르가 된 이들의 데뷔 40주년이다. 이들의 노래에 정말 힘이 없을까. 사진은 각각 찍은 두 사람을 이어 하나로 만든 것이다. 류효진 기자

남자는 지금까지 살면서 지켜온 삶의 도 같은 건 없다고 말했다. 아마 그 삶도는 그의 노랫말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자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사는 것”이라고 답했다.

태춘은 太春이고, 은옥은 恩玉이다. 커다란 봄을 기다려온 남자, 그런 그를 은혜롭게 감싸온 보배 같은 목소리의 여자. 이름대로 산다는 말이 맞나 보다.

데뷔 40년, 시장을 떠난 정태춘 박은옥이 한시적으로 다시 자신들을 시장에 내어놓았다. “이건 내가 쉽게 받았어요. (이혼하고 돌아온) 딸과 손녀, 아내까지 우리 네 식구 먹고 살아야 하니 나도 일이 필요하고요. 그래서 적어도 1년은 하자는 대로 다 하기로 했어요. 마케팅에도 참여하고 방송도 출연하고. 나한테 뭔가 끌어낼 것이 있다면 다 가져가고 다 보여줘라, 그렇게 1년 함께 재미있게 놀아보자는 거죠.”

세상은 격하게 반긴다. 공영방송에서 이들의 40년을 조명하는 프로그램을 둘이나 편성했다. ‘전설’이라 명명하며 후배 가수들이 그들의 노래를 재해석하는 ‘불후의 명곡’, 두 사람의 특집 무대를 마련한 ‘열린 음악회’가 그것이다. 여자는 “이상하게도 마치 어제도 왔던 곳처럼 편안했다”는 반면 남자는 “내가 제3자인 것마냥 무척 낯설었다”고 말했다.

이 달에 40주년을 기념해 가족앨범이 출시되고, 전국 순회 콘서트도 시작된다. 정태춘의 붓글과 미술가들의 작품을 모은 전시가 열리고, 정태춘 시집 ‘노독일처’의 복간, 새 시집 ‘슬픈 런치’의 출간이 예정돼있다.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도 제작 중이다.

이 프로젝트가 대박 나면 좋겠다. 콘서트에 매진이 이어지고, 전시장에 관람객이 북적이면 좋겠다. 새 앨범에 이어 옛 노래들도 전설의 흥행을 재현하면 좋겠다. 그래서 이들의 언어가, ‘정태춘 박은옥’이란 장르가 아직도 유효함을 증명했으면 좋겠다. 이들의 노래에 담긴 이상이 아직 현실이 되지 않았으므로, 이상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대중이 응답해주면 좋겠다. 정태춘이 꿈꾸고 박은옥이 부른 노래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그리하여 그 남자와 그 여자가 오래도록 무대에서 우리와 이야기 하기를 바라본다.

박은옥씨를 앞에 쓴 정태춘씨의 붓글. 삶의 동반자이자 동지에게 그는 고마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정태춘박은옥40프로젝트사업단 제공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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