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Ma 레스토랑 ‘더 모던’ 김지호 페이스트리 총괄 셰프

2015년 가을 ‘미쉐린 가이드북 2016 뉴욕편’이 발표됐을 때 미식가들의 시선은 뉴욕현대갤러리(MoMa) 한 편에 있는 레스토랑 ‘더 모던’으로 향했다. 샌프란시스코의 레스토랑 ‘퀸스’를 미쉐린 1스타에서 3스타로 끌어올린 요리사 아브람 비셀이 2014년 더 모던으로 자리를 옮긴 이듬해, 곧바로 2스타를 달며 뉴욕 미식 트렌드의 중심지로 올라선 것. 이 스타 셰프가 디저트 담당 파트너로 선택한 사람이 경주관광교육원 요리학교를 졸업한 한국인 김지호(47)씨다. 미국으로 건너간 지 12년만의 일이었다.
지난달 25일 서울 레스케이프 호텔의 레스토랑 ‘라망시크레’에서 만난 김지호 더 모던 페이스트리 총괄 셰프는 “자부심이 크지만 항상 미식 트렌드를 이끌어야 한다는 중압감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라망시크레가 더 모던과 협업하면서 디저트 레시피를 전수하고 있는 그는 22~23일 협업 갈라 디너를 선보이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디저트 담당이지만 수프나 메인 요리 연구할 때도 아이디어를 내요. 한국 식재료, 한국인 입맛을 잘 아니까 이런 행사에는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죠. 확실히 차이가 있어요. 미국인은 돼지고기, 닭고기, 쇠고기, 양고기 특유의 육향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반해 한국인은 육향을 최대한 덜어낸 부드럽고 기름진 고기 맛을 좋아해요. 품종도 다르더군요. 이번 요리에 닭 육수를 내는데 육향이 적어 뉴욕에서 쓰던 닭고기 양의 3배를 썼어요.” 그는 이번에 1970년대 국내 출시됐던 우유맛 아이스크림에서 영감을 받은 화이트초콜릿 타르트와 밀크 소르베를 내놨다.
◇쿠키공장 직원부터 다시 시작
미국에서 내로라하는 요리사로 거듭났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주목 받은 건 더 모던에 들어간 2014년, 디저트 전문 요리사가 된지 20년만이었다. 1993년 국내 한 특급호텔에 입사한 그는 1년 간 “평생 먹을 양파를 다 까보고” 디저트로 전문 영역을 바꿨다. 김씨는 “전채부터 메인까지 ‘요리’를 만드는 쿡(cook)을 하기에는 제 재능이 부족하다고 느꼈다”고 설명했지만, 전업 5년 만에 대학 강단에 설 만큼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요리사가 된지 딱 10년째 되던 2002년 최신 디저트 문화를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 유학파 요리사들의 필수코스로 꼽히는 미국요리학교(CIA·Culinary Institute of America)로 갔느냐는 질문에 “쿠키 공장에 들어갔다. 당장 돈을 벌어야 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라틴계 직원부터 인도계, 아프리카계까지 말 그대로 ‘인종의 용광로’를 체험할 수 있던 그 공장에서, 김씨를 안쓰럽게 본 한 중국인 직원은 항상 달걀을 삶아와 그에게 권했다. 공장 임금이 너무 적어 아르바이트로 르메르디앙 호텔의 디저트 셰프 자리를 구했지만 일주일만에 잘렸다.

더 높은 임금을 찾아 몇 개의 레스토랑을 전전한 후 찾은 곳이 보스턴 최고급 레스토랑 ‘레스팔리에’였다. 일간지 보스턴글로브가 줄곧 최고의 식당으로 꼽는 그곳의 총괄 셰프가 프랭크 맥셀랜드(Frank McCelland), 바로 아브람 비셀의 요리 스승이었다. 김지호 셰프는 “그런 급의 레스토랑이면 만든 음식을 시식해보는데, 이런 절차 없이 바로 입사했다. 프랭크가 면접에서 ‘난 널 믿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레스팔리에에 지원하기 전, 김씨는 먹고 살기 위해 샌드위치 가게를 운영하며 출소자들에게 빵 굽는 법을 가르쳤고 이런 선행이 보스턴 지역신문에 났던 찰나였다.
◇하버드생들과 디저트연구… 분자요리 붐 타고 명성
시련은 입사 후 두 달 만에 찾아왔다. 그의 디저트를 먹지 않고 돌려보낸 손님이 너무 많았던 것. 김씨는 뉴욕으로 건너갔고 르 베르나댕, 로엘 로브숑 등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600달러짜리 디너코스를 먹고 나서야 빵가게에서 파는 치즈케이크와 레스토랑에서 내놓는 티라미수는 달라야 한다는 걸 알았다. 김지호 셰프는 “더 모던에서 파는 디저트가 최소 27달러, 우리 돈 3만원인데 이 돈 주고 케이크 한 조각 받으면 아쉽지 않겠냐”고 되물었다. “빵 장인이 정형화된 빵을 맛있게 굽는데 치중한다면, 디저트 셰프는 구운 빵을 접시에 올리는 순간부터 실력이 판가름 나요. 보통 아이스크림과 케이크류가 한 접시에 나가는데, 두 가지 디저트를 하나의 테마로 연결하는 소스를 따로 준비해야 하죠.”
요리를 개발하다 막히면 단골인 MIT 화학 교수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하버드 학생들과 요리 과학 연구소를 차려 식재료의 특성을 연구했다. 계란 흰자, 노른자의 익는 온도가 다르다는 걸 그때 알았고, 이런 배움을 바탕으로 색다른 디저트를 잇달아 선보였다. 때마침 분자요리(식재료의 물리, 화학적 특성을 살려 만든 독특한 질감의 음식)가 전세계 미식 트렌드를 강타하며 유명 디저트 셰프가 됐다.
놀라운 건 지금부터다. 미국 이민 10년만인 2012년 한국에 금의환향했지만 정부 직업학교에서 요리를 배운, 최종학력 고졸인 그를 받아주는 국내 식당은 단 한군데도 없었다. 그가 일한 150년 전통의 레스팔리에는 보스턴 일대를 다루지 않는 미쉐린 가이드북에 소개될 리가 없었다. 김지호씨는 “딱 1년간 구직한 후 미국으로 되돌아갔다”고 말했다. 뉴욕으로 건너간 지 한 달 만에 ‘고든 램지 앳 더 런던’의 페이스트리 총괄 셰프가 됐다.

1년 후 더 모던의 총괄 셰프가 바뀌며 대대적인 구인 공고가 났다. 스승 프랭크의 극찬을 익히 알던 아브람은 수많은 지원자 중 딱 한 명, 김지호씨를 페이스트리 총괄 셰프로 지정해 사장과 면접을 진행했다. 더 모던 사장이 싫어하는 헤이즐넛을 시식용 디저트에 듬뿍 넣었지만 “당신 음식을 먹고 헤이즐넛에 대한 편견을 깼다”는 칭찬을 들으며 거뜬히 입사, 5년 간 미식 트렌드를 만들고 있다.
“요리사는 다른 직업보다 노동 강도가 세고 치열해요. 하지만 그만큼 기회도 많습니다. 좋은 레스토랑에서 시작하지 못해도, 처음부터 자기 요리를 만들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도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는 기회가 와요. 제가 그 증인이니까요.”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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