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러하듯 사람들은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생존 본능이 해결된 뒤에야 사람들은 주변을 둘러보고 여유를 찾게 된다. 경제가 문화를 앞서는 이유다. 21세기 경제는 ‘4차 산업혁명’을 얼마나 신속히 도입하여 생산 활동에 얼마나 효율적으로 적용하는가가 관건이 될 전망이다. 인공지능(AI) 혁명, 지식산업의 발전이라는 추세를 잘 따르거나 선도하는 지역과 나라는 발전할 것이고, 2차·3차 산업사회에 머물러 있는 지역과 나라는 뒤처지고 말 것이다.
100년 전에도 가장 중요한 화두는 경제였다. 경제가 발달하면 사람들은 매사를 능동적으로 대하고 낙관적인 태도를 보인다. 침체할 경우 우울해지고 관계망을 좁히고 고립된 채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온다. 경제가 발달하는 지역은 개방적이고 융통성이 있고 관용적이며, 이념보다는 실용을 우선한다. 반대 지역은 폐쇄적이고 적대적이며, 특정 신념이나 이론에 집착하고 그것에 매달린다. 관용적이고 실용적인 선진국과 폐쇄적이고 이념지향적인 후진국이 나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150년 전, 우리나라도 그러했다. 경제가 발달하는 지역은 개방적이어서 다른 사조나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탄력적이었던 반면, 침체 지역은 기존에 건설된 관계망조차 와해되는 상황에서 차별적이고 배타적으로 변해 갔으며, 특정 이념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150년 전, 서울이 경제가 발달한 지역이었다면, 경상도는 침체되던 지역이었다. 그런 이유로 개화사상(開化思想)은 서울에서 생겨났고 그곳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개혁·개방을 위한 몸부림이 벌어진 반면, 경상도 지식인들은 ‘위정척사(衛正斥邪)’를 기치로 내걸고 온몸으로 새 시대를 거부했다. 그렇지만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과 식민지로의 전락에 대한 저항의 몸짓으로는 찬란했지만, 조선이 식민지가 되는 것을 막는 데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300년 전, 경상도는 안동을 중심 권역으로 하는 새로운 지역적 헤게모니가 출현했다. 그곳이 당시 발달하던 벼농사의 선진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형 하천 주변에 형성된 광대한 평야지대에서 벼가 무르익는 것을 지켜본 현대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300년 전만 해도 안동과 동북부 권역의 산간지대가 이앙법(移秧法)에 기초한 벼농사 곡창지대였다. 이 곳이 수리 조건, 종자, 인력 동원, 개간 가능성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농업 선진지대였기에 이곳은 많은 사람들을 부양할 수 있었고,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문화가 꽃 필 수 있었다. ‘퇴계학(退溪學)’으로 대표되는 성리학의 발전, 그것을 묵수하는 지식인들, 수많은 인재들의 배출은 그 결과였다.
600년 전, 경상도의 중심은 선산(오늘날 구미)이었다. 이곳이 당시 선진농법으로 각광 받던 무논에 볍씨를 뿌리는 방식, 곧 수경직파법(水耕直播法)이 시행되던 지역이었고, 야은학파(冶隱學派)로 대표되는 조선 성리학의 싹이 발아한 지역이었으며,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되던 지역이었다. 이곳은 1392년 조선 왕조 개창 이후 개통된 ‘영남대로’가 관통하는 육상 교통의 요지이자, 경상도의 수리와 물류의 한 축을 담당하는 낙동강이 지나가는 수상 교통의 중심지였다. 농업경제의 발달과 물류 인프라의 확대 속에, 인구가 집중하고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으며, 고유 문화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조선 인재의 절반은 경상도에 있고, 경상도 인재의 절반은 일선(선산)에 있다”는 신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600년 전 선산은 경상도의 중심이었을 뿐 아니라, 각종 경제 지표상에서 전국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 이곳에서 발달하던 수경직파법은 세종대 『농사직설(農事直說)』이라는 농서로 집대성 되어 전국으로 유포되었으며,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영릉성세(英陵盛世)’, 곧 세종 치세(1418~1450)를 뒷받침했던 테크노크라트들의 산실이었다. 경제가 문화를 선행하고, 문화를 기반으로 새로운 사조가 생겨나 사회, 국가 전체를 선도하는 선순환이 일어난 것이었다.
600년 전 선산의 선진성은 경제 발전, 우호적인 물류 조건, 인구 집중이라는 환경이 낳은 결과물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4차 산업혁명’에 기반한 사회는 농업사회나 2·3차 산업사회와는 비교가 불가능하리라만치 빨리, 전면적으로 변해갈 것이다. 급변하는 시간, 전례 없는 광폭의 공간 변화를 초래할 현금의 상황에서, ‘사람과 길’이라는 프리즘으로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600년 전의 선산과 400년 전의 대구, 300년 전의 안동이 가장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김성우 대구한의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