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목욕 봉사하는 조균희씨 “기다리는 사람 너무 많아 봉사 못 멈춰요”
경북 칠곡에서 부동산을 운영하는 조균희(55)씨와 약속을 잡을 때는 화요일 저녁은 피하는 것이 좋다. 술 약속은 더더욱 안 된다. 화요일마다 일찍 귀가해서 9시 뉴스만 보고 잠을 청하는 까닭이다. 2012년부터 8년째 유지하고 있는 ‘화요일의 라이프 스타일’이다.
수요일 오전에 있는 목욕 봉사 때문이다. 9시부터 오후1시까지 두 명이 팀을 이뤄서 50명 정도의 장애인을 목욕시킨다. 끝나고 나면 파김치가 될 정도로 힘들다. 조씨는 “전날 술이라도 마시면 입에서 단내가 날 것이 뻔하다”면서 “목욕 봉사를 잘하기 위해 화요일엔 수도승이 된다”고 말했다.
“중증 장애인은 가족들도 목욕을 시켜주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다 보니 목욕봉사자와 대상자 사이엔 혈연보다 깊은 정이 흐릅니다. 자식보다 더 좋다는 분도 많고, 대부분 저만 만나면 목욕 끝날 때까지 수다를 떱니다. 어느새 둘도 없는 말벗이 된 거죠.”
처음엔 경계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몇 달 혹은 며칠 저러다 말겠지, 하는 반응이었다. 2001년 고아원을 방문했을 때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음식을 가지고 갔지만 아이들이 가까이 오지 않았다. 한번 왔다가 사진만 찍고는 다시는 안 올 거란 말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경계하는 눈빛이 가장 가슴 아팠죠. 말 한 마디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정말 소처럼 묵묵히 때를 밀었습니다. 해가 넘어갈수록 조금씩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더군요. 지금은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봉사를 못 멈춥니다.”
◇ 3년 동안 집안에 칩거한 사연
조씨 자신도 세상을 향해 마음의 벽을 쌓은 적이 있었다. 3년 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스물아홉 살,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손 하나를 잃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저렇게 사교성 좋고 적극적인 학생은 세상에 둘도 없겠단 말을 들었지만, 막상 장애가 생기자 마음이 절망의 감옥에 갇혔다. 자동차 부품 사업을 하겠다는 꿈도, 중학교 시절 일기장 맨 앞에 적었던 ‘성공해서 자선사업가가 되고 싶다’는 포부도 모두 버렸다. 낮이 소멸하고 오로지 밤만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그때 친구들이 손을 내밀었다.
“친구들이 수시로 찾아오더군요. 피를 나눈 형제처럼 지냈던 친구들이었죠. 내가 코빼기도 안 보였지만 지치지도 않고 벨을 누르더군요. 세상에 그렇게 지독한 사람들도 없을 겁니다, 하하! 결국 제가 손을 들었죠.”
여동생 부부의 도움을 받아 세차장을 일을 했다. 2008년에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중개 사무실을 열었다.
목욕봉사를 처음 했을 때는 손해도 많이 봤다. 봉사를 끝내고 폰을 열어보면 부재중 전화가 떠 있기 일쑤였다. 통화가 안 돼서 다른 중개사 사무실로 간다는 문자도 종종 있었다.
지금은 봉사활동을 한다는 것이 알려 지면서 손님들이 기꺼이 자기 시간을 버려가며 조씨를 기다려준다. 조씨는 “사무실에 기다리고 있는 손님들을 보면 고맙단 마음에 앞서 제 삶이 인정받는 것 같다 자부심이 생긴다”고 말했다.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준 동생 부부는 물론이고, 두 아들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했는데, 그 각오와 결심이 결실을 맺는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주변 사람들도 얼굴 보면 ‘안녕하세요’보다 ‘수고하십니다’하는 인사를 건넵니다. 봉사에 대한 격려겠지요.”
◇ 가장 감격적인 호칭, “조균이 아저씨”
조씨의 활동에 가장 뿌듯해하는 사람들은 3년 동안 찾아와서 용기를 주려고 노력했던 고등학교 친구들이었다. 동창회에서 조씨는 봉사의 롤모델이다. ‘학교 동문을 빛난 봉사자’로 추천을 받았지만 아직 상을 받을 만큼은 아니란 생각에 한사코 거절했다.
“같이 봉사하자는 친구들이 많아요. 그런데 목욕봉사가 아니라 음악봉사에 동참하고 싶다는 친구들이 대부분입니다. 목욕은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하더군요, 하하!”
조씨는 벌써 3년째 요양원, 경로당 등을 돌면서 노래 봉사를 하고 있다. 진성의 ‘안동역에서’를 가장 잘 부른다. 구성진 창법 덕분에 팬들도 많이 생겼다. 모 장애인단체에 가면 지적장애인들이 “조균이 아저씨”라고 부른다.
“저도 제 이름을 부르는 걸 듣고 깜짝 놀랐어요. 제가 노래를 잘 부른다기보다는 진심이 닿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애인들은 순수한 만큼 사람 보는 눈도 정확하다고 했다. 이를테면, 정치인 등 사진 찍는 것이 목적인 방문객들은 귀신처럼 알아채고 마음을 닫는다고 했다.
“얼마 전에는 그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새해 인사도 받았어요. 폰을 만지는 것도 대단한데 문자라니요, 너무 감동했죠. 제가 잘하고 있다는 확신으로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조씨는 “장애를 얻은 후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던 게 가장 마음에 걸린다”면서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또 두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로 살아내는 것이 삶의 목표”라고 밝혔다.
“손을 잃는 바람에 제가 계획했던 삶은 살지 못했지만, 설사 제가 원하던 성취를 했다 하더라도 지금보다 더 큰 사랑과 존경을 받지는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인분들을 비롯해 삶에서 좌절을 겪은 분들이 저를 통해 용기와 희망을 얻기를 소망합니다.”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송종석 대구한국일보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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