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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단역배우를 ‘1% 고위층’에 알선… 브로커 고씨의 ‘성매매 캐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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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단역배우를 ‘1% 고위층’에 알선… 브로커 고씨의 ‘성매매 캐스팅’

입력
2019.04.04 04:40
수정
2019.04.07 18:06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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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씨, 2011년부터 활동한 듯… 캐스팅디렉터ㆍ에이전시라며 접근

“영화 출연시켜주겠다” 유혹, 기업인ㆍPDㆍ재벌가 등에 성매매 알선

화대 올리려 업소여성 ‘프로필 세탁’도… 검경 인지 불구 수사 안해

한국일보가 법원과 검찰을 통해 확보한 성매매 여성의 자술서. 드라마 제작사 실장이라고 밝힌 고씨에게서 성매매 제안을 받았다고 돼 있다.
한국일보가 법원과 검찰을 통해 확보한 성매매 여성의 자술서. 드라마 제작사 실장이라고 밝힌 고씨에게서 성매매 제안을 받았다고 돼 있다.

인터넷 쇼핑몰 모델 출신 차지영(가명)씨는 ‘고○○’이라는 이름 석 자를 듣자마자 목소리를 떨었다. 금세 울음이라도 터트릴 듯했다. 그는 고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는 질문을 받고 잠시 곱씹었다. 그리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되게 안 좋은 기억이 있어 가지고…. 저를 (고씨가) 어떤 영화에 캐스팅 해주신다고 하면서 이상한 것을 요구했어요. (그래서) 연락을 차단한지 꽤 됐어요. (전화번호를 차단한) 그 뒤에도 다른 번호로 자꾸 연락을 해 협박 아닌 협박을 했어요.” 차씨가 말한 ‘이상한 것’은 다름 아닌 성매매를 의미한다. 그가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치를 떨었던 고씨는 40대로 추정되는 여성으로 이름이 본명인지도 불분명하다.

한국일보는 클럽 버닝썬,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나아가 지난달 7일 10주기를 맞이한 고 장자연씨 죽음을 에워쌌던 대한민국 고위층 성범죄 시스템의 외연을 취재하던 중 주로 단역이나 신인 배우 출신 여성을 고위층 성 매수자들에게 공급하는 조직에 대한 증언 다수를 확보했다. 이들의 인터뷰와 증언을 담은 각종 진술서에 따르면, 조직의 정점에는 성매매 여성 ‘캐스팅’을 전담하는 고씨가 서있다. 본보는 지난 2개월 동안 고씨를 추적했고, 그와 인연을 맺은 차씨, 연예계 관계자 등에 대한 취재를 통해 고위층 성매매의 기상천외한 시스템에 관한 대략적인 윤곽을 그릴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일부나마 고씨의 ‘고객’들이 누구인지 증언하는 구체적인 단서들에 도달했다. 고씨와 그가 주도하는 고위층 성매매 조직의 존재는 경찰과 검찰도 인지하고 있지만, 수사의 움직임은 없다. 베일에 둘러싸인 고씨로 축약되는 대한민국 고위층 성매매 생태계를 공개한다.

◇기업인, PD, 재벌가 인물 고객리스트 올라

고씨를 아는 사람마다 그의 직업과 이력을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다. 연예인 매니저 출신, 드라마 제작사 실장 출신, 모델 에이전시에서 일하는 사람, 프리랜서 단역 캐스팅 디렉터 등이다. 그를 통해 여성과 성매매를 하거나 접대를 받는 이들은 기업인, 투자자, 방송사PD나 영화감독 등이라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고, 심지어 재벌가 인물도 고씨의 고객리스트에 올라있다는 성 매매 여성의 자술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고씨는 여배우나 모델 출신들을 확보하기 힘들어지면, 유흥업소 종업원들을 단역으로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시켜 배우로 둔갑시키는 방식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여배우라는 타이틀을 달면 몸값이 올라 성매매 건당 200만~500만원을 받게 되며, 30% 가량을 수수료로 고씨가 챙겨가는 식이다.

고씨의 행위를 알고 있다는 연예계 관계자 장민식(가명)씨는 “고씨 때문에 열심히 하는 신인들이 오해 받는다”라며 “배우를 꿈꾸는 애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성매매를) 안 하는데, 포기하는 애들 중 탈선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씨의 알선으로 성매매에 나섰던 한 여성은 소속 기획사 대표와 소송에 나선 과정에서 고씨의 성매매 알선 혐의를 상세히 기술한 자술서를 지난해 경찰과 검찰에 제출했다. 하지만 고씨에 대한 수사는 1년 가량이 지나도록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고씨의 지인들은 고씨의 성매매 알선 대상이 고위층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장자연 사건과 김학의 사건에서 보여준 수사당국의 무기력한 모습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픽 박구원 기자
그래픽 박구원 기자

◇화대 올리려 유흥업소 여성 단역배우로 둔갑

장민식씨는 “고씨는 2011년부터 이런 일을 했다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장씨는 “영화나 드라마 제작하면 보조 출연자, 단역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프리랜서로 온다”라며 “고씨는 여자들에게 아주 작은 배역을 만들어주고 프로필을 개선해 준 다음에 몸값, 즉 화대를 올린다”고 했다. 룸살롱에서 혹은 연예계를 기웃거리다 돈이나 벌기로 작정한 여성들을 고르고, 유흥업소 마담들한테 공수를 받기도 한다고 했다. 장씨에 따르면 고씨는 성매수자한테 마치 레스토랑 메뉴판을 내밀듯 해당 여성들의 신상을 담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을 보여준다. 배우라는 타이틀이 붙으면 성매매 단가가 올라가기 때문에, 여성들에게 촬영 현장에서 자기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도록 하고 이를 성매수 고객에게 보여주는 식이다. 배우 경력이 없으면 성매매 건당 100만원 정도, 단역이라도 출연 경력이 있으면 200만~500만원 정도가 대략적인 화대이다. 이른바 프로필 세탁이 이뤄지는 배경이다. 스폰서 개념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고정적으로 성매수 남자를 만날 경우 배우 출신이라면 한 달 2,000만~3,000만원 정도에 이르기도 한다.

성매매에 투신한 여성들은 고씨의 제안에 동의 후 가담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강제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차지영씨의 증언 등을 들어보면, 고씨는 배우ㆍ모델 지망 여성들의 취약한 환경과 불안한 심리상태를 이용해 사실상 협박에 가까울 정도로 강요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차씨가 기억하기로 고씨는 모델 에이전시 소속이라며 자신에게 접근했다. 차씨는 “영화 해주는 PD님이랑 저녁만 먹으면 된다는 식으로 처음에 말하더라”며 “그건 아닌 것 같다고 하니까 제가 가정이 조금 힘들었는데, 가정 환경을 언급하며 ‘너는 그거 생각을 안 하냐’는 식으로 이야기 했다”고 말했다. 차씨는 이후 고씨가 다시 연락을 해 “방송 쪽 일을 해보라고 말하며 ‘그런데 너는 나이가 있으니까’ 이러면서 (접대 등을) 제안했다”라며 “그렇게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닌데 고씨는 ‘너 모르지, 다른 연예인 누구누구도 다 (스폰서를) 만났다, 너 멍청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그는 고씨가 성매매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성매매 제안이었음을 인정했다. 차씨가 고씨 전화번호를 차단한 후에도 고씨는 다른 번호로 전화해 화풀이했다. 차씨는 무서웠다고 했다. 그는 고씨와의 일을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검경에도 접수된 고씨의 성매매 알선 첩보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성매매처벌법) 등에 따르면, 일반 성매매알선은 공소시효 5년, 영업으로 성매매를 알선하거나 성을 파는 행위를 할 사람을 모집하고 그 대가를 지급받은 사람은 공소시효가 7년이다. 또 폭행이나 협박으로 성을 팔게 하는 사람은 공소시효가 10년이다. 고씨는 공소시효 7년에 해당하는 범죄에 근접한 것으로 보이는데 2011년부터 성매매 알선에 나선 게 사실이라면 거의 모든 범죄 상당 부분이 수사 여부에 따라 처벌이 가능하다. 성매매 자체의 공소시효는 5년이며, 성매매처벌법에 규정된 죄를 범한 사람이 수사기관에 신고하거나 자수한 경우에는 형을 감경하거나 면제할 수 있게 돼 있다.

한국일보가 법원ㆍ검찰 등을 취재한 결과, 검찰과 경찰은 고씨에게서 성매매 제안을 받고 실제 성매매에 나섰던 A씨가 성매매 사실을 자필로 적은 자술서를 지난해 확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단역 배우였던 A씨가 2015년 성매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소속사 대표 B씨는 A씨에게 “소속사에 피해를 줬다”며 다그치는 과정에서 A씨에게 관련 자술서를 작성하게 한 것이다. 이후 A씨는 B씨에게 협박 당하고 금품을 빼앗겼다며 2017년 민사소송을 제기했고, 지난해 4월에는 서울 수서경찰서에 고소했다. 고소 과정에서 경찰에 A씨가 작성한 자술서도 제출됐으며, 서울중앙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는 이 사건을 넘겨받아 지난해 10월 B씨를 공갈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B씨는 관련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검찰과 법원 등을 통해 확인한 A씨의 자술서에는 재벌가 성매매를 제안 받았지만 자신은 재벌가 성매매는 하지 않았다고 언급돼 있다. A씨는 “너무 유명한 분이라서 하지 않았다”고 주변에 이야기 한 것으로 전해졌는데, 고씨가 해당 재벌가에 다른 여성들의 성매매를 알선했다는 주변 인물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A씨는 자술서에서 “드라마제작사 실장으로 있던 고씨가 제 프로필을 보고 연락해 왔다”라며 “배우로 키우고 싶다는 말에 미팅을 가졌고, 며칠 후 그가 성매매를 제안했으며 연기 생활에 돈이 필요했던 저는 시키는 대로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A씨는 자신이 만났던 남성들은 신분을 거의 숨겼고 서울 강남이나 청담동 쪽 카페에서 처음 만난 후에 결정이 나면 호텔로 갈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고 자술서에 썼다. 돈은 고씨가 먼저 받고 자신에게 입금해줬다. A씨는 “고씨와 연관된 분들도 계셨는데 모두 가명을 썼다”라며, “(고씨가 말하기를) 한남동 유엔빌리지에 사는 김모씨가 다른 사람(성매매 여성)에게 돈을 많이 썼다며 저에게도 돈을 많이 쓰게끔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고 했다. 서울 유엔빌리지는 재력 면에서 국내 최상위 계층이 주로 사는 대표적인 부촌이다. A씨는 한국일보와 통화에서 “성매매를 했다는 부분은 B씨에게 협박을 받아서 허위로 작성한 것”이라고 말했다.

A씨 사건을 대리하는 법무법인 동신 임상철 변호사에게 자술서의 진위를 거듭 확인한 결과 “그런 자술서를 경찰과 검찰에 제출한 것이 맞다”라며 “고씨의 성매매 알선에 대해 아직 이렇다 할 수사가 진행되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검찰 관계자는 “그 자술서는 피고인이 작성하도록 했고 피해자가 쓰고 싶어서 쓴 것이 아니었다”며 “피해자 입장에서 조사해서 기소한 것으로 그 부분(고씨의 성매매 알선)에 대해 조사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A씨의 성매매 사실을 알고 B씨가 A씨를 협박했고 그 상황에서 자술서가 작성된 것은 맞지만, 공소장에는 자술서가 허위라는 부분은 없고 허위로 확정할 만큼 수사가 진행된 것도 없다. 검찰은 고씨를 불러 조사한 적도 없다고 했다. 일반인을 상대로 한 성매매 알선이 아니라, 고위층을 대상으로 한 성매매 알선이기 때문에 수사 당국이 몸을 사리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한국일보는 취재를 마치고 고씨의 해명을 듣기 위해 3일 그에게 전화했다. 성매매알선에 대해 묻자 “엿 같은 소리 하고 있다, 이거 실례 아니냐, 경찰이냐”고 소리를 질렀다. “여성분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자, 고씨는 “말 같지 않은 소리 하지 마시고요, 나를 신문하시네? 댁이 혹시 기자인지 경찰인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오늘 전화번호 바꿀 거다, 전화하지 말라”고 했다. 그의 전화번호는 통화한 지 두 시간 후부터 해지된 번호로 나왔다.

이진희 기자 river@hankookilbo.com

정준호 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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