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김경집의 통찰력 강의] 벤치클리어링의 때가 왔다!

입력
2019.04.02 04:40
29면
0 0

프로야구가 개막되었다. 선수들은 스토브리그 동안 몸을 다듬고 기량을 연마했으며 팬들은 마침내 봄이 왔음을 뜨겁게 느끼는 시기가 왔다. 스포츠에 열광하는 건 공정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 자신과 팀의 능력을 아낌없이 발휘하는 극본 없는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스포츠정신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깔려있다. 이겨야 하는 라이벌이지만 동업자 정신과 함께 비겁하고 더럽게 이기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는 당당함이 스포츠의 매력이다.

프로스포츠는 기본적으로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진행된다. 특별히 팀의 색깔을 정해놓은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홈팀은 흰색 유니폼을 입고 원정팀은 유색의 유니폼을 입는다. 그건 일종의 불문율이다. 그런데 그 불문율에는 상대에 대한 섬세한 배려가 깔려 있다. 지금과 달리 프로스포츠 초창기에는 원정 가서 빨래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흰 옷은 쉽게 더러워진다. 홈팀은 빨래와 건조가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그래서 홈팀이 흰색 옷을 입기 시작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프로와 아마추어를 막론하고 스포츠는 오로지 승리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며 동업자 정신을 발휘하는 것이 진정한 스포츠맨십이다.

프로야구를 보면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벤치클리어링이다. 누가 빌미를 제공했고 더 많은 잘못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몸싸움이 나면 모두가 벤치를 박차고 튀어나와 상대편과 치열하게 싸운다. 오로지 자기편을 보호하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다. 프로팀은 언제든 트레이드와 이적이 가능하다. 내 편 네 편이 영원하지 않다. 그런데도 일단 한 팀이 되면 개인적 호오를 떠나 벤치클리어링 때 무조건 나가 싸운다. 혹시라도 벤치에 남았다면 그는 그 팀에서 따돌림을 각오해야 한다.

한 여배우가 권력과 부의 횡포로 성적 억압과 폭력에 시달렸고 인격이 유린되어 끝내 자살했다. 그는 유서를 통해 사건의 내막을 자세히 기록하여 고발했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도록 그녀가 목숨으로 고발한 사건은 쉬쉬하며 의도적으로 묻혔다. 막강한 보수언론의 사주 일가와 부패한 권력자들이 관여되었기 때문일까? 마침내 동료이자 후배 여배우가 용감하게 치욕스러운 경험을 고백하며 고발했다. 철옹성 같은 그 부패의 카르텔이 두렵지 않았을까? 두려웠을 것이다. 목숨마저 위태롭다는 불안감에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정신건강 상태에 대한 의사 소견을 공개하며 자신은 결코 자살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혹시 누군가 자신을 위장 자살시킬지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 때문일 것이다. 그런 추론이 가능한 사례들이 너무나 많은 사건이었으니까.

그는 그 사건을 목격한 다른 배우들의 존재를 상기시키며 죽음으로 항거한 ‘동료’ 여배우 사건의 진실을 말해달라고 ‘호소’했다. 그 가운데는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배우도 들어있다. 그러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같은 소속사 출신이지만 본 적은 없고 잘 알지도 못한다는 변명뿐이다. 그 심정 이해할 수 있다. 그들도 두려울 것이다. 혹시라도 그 불똥이 자신에게 튀어 여배우로서의 평판에 크게 허물이 되면 자신의 앞날이 어찌 될 것인지 걱정될 것이다. 또한 그동안 부패한 권력과 언론으로부터 수많은 압력과 감시가 있었을 것이니 진실을 밝히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건 엄청난 검은 권력에 대한 공포건 한 동료 배우의 죽음보다 더 무겁지는 않을 것이다. 진실을 호소한 그 여배우도 자신의 도전이 배우로서의 앞날을 거둬들일 것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용기를 내 고발했다. 억울하게 죽었고 진실마저 묻히는 것에 분노했다. 자신의 미래를 건 용기였다.

극악무도한 범죄행위조차 악당들에게 칼자루가 쥐어진 상태에서는 그들 마음대로 흘러간 것이 지난 시절의 궤적이다. 저항해봐야 자기만 손해라는 그릇된 선입견이 학습되었고 그 악당들에게 순응하며 살아왔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고 부끄러움이다. 그러나 이제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이전과는 다른 상황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고발해야 한다. 그 용기에 동료시민들이 응원할 것이고 지켜낼 것이다. 그 사건은 우리 모두의 범죄이며 그래서 모두가 책임감을 갖고 진실을 밝혀내고 정의를 회복해야 한다. 악당들에게는 그 죄의 값을 치르게 하고 역사에 그 범죄를 기록함으로써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

프로야구가 개막했다. 겨우내 갈증을 느꼈던 팬들에게는 그게 봄의 전령이다. 배려와 존중 그리고 공생의 스포츠맨십이 보여주는 가치를 기억해야 한다. 누군가는 벤치클리어링을 보면서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할 것이다. 눈살 찌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게 동료를 향한 연대의 애정과 팀스피리트의 표상이라는 점을 알면 배울 것도 많을 것이다. 나는 프로야구에서의 벤치클리어링이 그래서 좋다. 장자연사건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벤치클리어링해야 한다. 그래야 팀을 구할 수 있다. 모두 흰색유니폼을 입자. 봄이다. 부활의 봄.

김경집 인문학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