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ㆍ넥슨 등 붉은 띠ㆍ조끼 대신 인형ㆍ후드티ㆍ별칭
포괄임금제 폐지 최대 성과… 네이버, 단협 교착 등 진통
‘노조 불모지’로 불렸던 정보기술(IT)업계 처음으로 네이버에서 노동조합이 설립된 지 2일로 1년이 된다. 네이버에서 시작한 IT업계 노조 설립의 바람은 이후 넥슨, 스마일게이트, 카카오 등 유명 게임ㆍ인터넷 업계의 잇따른 노조 설립으로 이뤄졌고, 일부 업체들은 노사 합의에 따른 포괄임금제 폐지 등 성과를 이뤄내기도 했다.
IT업계 신생 노조들은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투쟁가를 부르는 대신 인형 탈을 쓰고 동요를 부르며 회사 측에 개선사항을 요구한다. IT업계에서 노조가 왜 필요한지 생각해보지 않았던 이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려는 시도인데, 기존 노동 운동의 선전 방식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네이버 노조 상징은 ‘꿀벌 인형’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직원들은 지난해 4월 2일 IT 업계 최초로 민주노총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화섬노조) 산하에 노조를 설립했다. “초기의 수평적 조직문화는 수직 관료적으로 변했고 활발한 소통문화는 사라졌다”고 동료에게 호소하며 깃발을 올린 네이버 노조는 출범 1년 만에 8,000여명의 직원 중 2,000여명이 가입, 25%의 조직률을 보이고 있다.
네이버 노조의 별칭은 ‘공동성명(共動成明)’이다. ‘움직일 동(動)’과 ‘이룰 성(成)’을 사용해 “모두 같이 행동해서 회사를 더 깨끗하게 성장시킨다”는 뜻을 담았다. 노조 내부의 수평적 소통을 위해 집행부는 간부 대신 ‘스태프’라고 부르고, 조합원들은 노조를 상징하는 조끼 대신 후드티를 입거나 사원증과 같은 초록색 목걸이를 착용한다.
단체행동 시에도 머리에 붉은 띠를 묶고 쟁의에 나서는 대신 꿀벌 인형 ‘네이비(NABEE)’가 마스코트로 등장해 회사를 향해 소통을 요구하는 뜻을 담은 풍선을 흔든다. 네이비는 ‘꿀 먹은 듯 답답한 회사 측의 협상 태도를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조합원’을 뜻한다. 이때 조합원들은 투쟁가와 노동가 대신 동요나 가요를 부르기도 한다.
이수운 네이버 노조 홍보국장은 “기성 노조의 선전 방식을 보면 어휘 선택이나 문법이 노조 활동 경험이 없는 조합원에게는 생경하게 느껴질 것 같았다”며 “조합원들이 부담 없이 참여하도록 친숙한 언어를 사용하고 풍선 같은 소품을 활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성 노조도 변화 바람
네이버 노조 이후 연달아 설립된 게임ㆍ인터넷 업계 노조도 보다 친근한 노동 운동을 고민하고 있다. 게임회사인 넥슨과 스마일게이트는 각각 게임용어를 사용한 ‘스타팅포인트’(게임의 시작점)와 ‘SG길드’(스마일게이트 길드), IT그룹 카카오는 ‘크루유니온’이라는 별칭으로 민주노총 화섬지부에 가입했다.
넥슨 노조는 조합원들이 거부감 없이 찾아올 수 있도록 조합 사무실에 캐릭터 인형을 배치해 동아리방처럼 꾸미고, 스마일게이트는 노조는 마스코트로 고양이 캐릭터를 만들어 ‘노조냥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배수찬 넥슨 노조 지회장은 “회사 생활을 하면서 겪는 불편을 노조에 편하게 얘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소통 방법을 많이 고민한다”고 말했다.
ITㆍ게임 업계의 신선한 투쟁 방식은 이들을 품은 민주노총 화섬노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화섬노조의 페이스북 페이지가 ‘섬식이’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게 대표적인 예다. 딱딱한 집회 영상 외에 카드 뉴스나 자체 제작한 설명 영상 등 다양한 콘텐츠가 올라온다. 임영국 민주노총 화섬노조 사무처장은 “새로 가입한 지회에 일방적인 배움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서로 배우면서 성장하고 있다”며 “온ㆍ오프라인 운동을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포괄임금제 폐지는 성과… 노사 갈등은 진행중”
ITㆍ게임 업계는 노조 조직 이후 가장 큰 변화로 포괄임금제 폐지를 꼽는다. 포괄임금제는 시간외 근로를 한 시간을 계산하지 않고 사전에 정해진 만큼의 초과근로를 한 것으로 간주한 채 초과근로수당을 지급하는 제도인데, IT업계는 이를 악용해 장시간 근로를 부추긴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차상준 스마일게이트 노조 지회장은 “노조 설립의 동기가 일을 한 만큼 임금을 받지 못하는 포괄임금제를 개선하는 것이었다”며 “노조가 아직 없는 넷마블도 자율적으로 포괄임금제를 폐지하는 등 업계 내 자정 노력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 뿌듯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
구성원이 젊어지고 투쟁 방식이 유연해졌지만 IT 업계도 노사가 겪는 갈등 구조는 기존 조직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네이버 노사가 단체협상 결렬로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대표적인 예다. 앞서 네이버 노조는 조합원 2,000여명의 의견을 수렴해 총 125개 조항이 담긴 단체교섭 요구안을 사측에 전달하고 15차례 단체교섭을 진행했으나 결렬됐다. 이후 고용노동부 중앙노동위원회가 조정안을 내놨지만, 사측은 업무유지를 위해 파업에 참여하지 않는 협정근로자를 지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노위 조정안을 최종 거부해 이에 반발한 노조가 지난 2월부터 단체행동에 나선 상태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는 “ITㆍ게임 업계는 창의적이고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내세운 스타트업에서 출발했지만 기존 대기업과 크게 다르지 않은 노사관리 문화를 갖고 있다”며 “전통적 제조업 중심의 노동 운동 방식과 달리 감성적 노동 운동이 확산되더라도 사측의 노사 관리 문화가 쉽게 바뀌지 않는 상황에선 노사 갈등은 언제나 악화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김지현 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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