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곳에 가까운 기업들의 주주총회가 집중된 지난 29일 ‘슈퍼 주총 데이’를 끝으로 12월 결산 상장사 2,200여 곳의 올해 주총 시즌이 마무리됐다. 예년과는 확연히 달랐다는 평가를 받는 올해 주총의 특징은 단연 주주들의 적극적 의결권 행사 노력이다. 특히 ‘주주 행동주의’ 기치 아래 다양한 주주제안을 관철하려 한 국내외 펀드와 소액주주,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자의 기업 의사결정 개입) 도입의 선봉에 선 국민연금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졌다.
◇‘주주 행동주의’ 싹 트다
31일 금융시장에 따르면 일부 해외 헤지펀드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주주 행동주의’가 올해 주총을 계기로 자생적 싹을 틔웠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런 흐름을 선도한 것은 토종 행동주의 펀드 KCGI(일명 강성부 펀드)다. 유명 채권 애널리스트였던 강성부씨가 대표를 맡아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통한 수익 창출을 표방한 이 펀드는 각종 갑질과 비정상적 지배구조로 질타를 받아온 한진그룹을 첫 타깃으로 잡았다.
감사, 사외이사 선임 등 7건의 주주제안을 내놓으며 공세를 폈던 강성부 펀드는 그러나 한진그룹의 숱한 견제에 결국 주총 표 대결도 해보지 못한 채 뜻을 접어야 했다. ‘주주제안 6개월 전부터 주식을 보유해야 한다’는 규정을 근거로 한진그룹이 제기한 소송에서 법원이 한진그룹의 손을 들어준 것이 결정적 타격이었다. 그러나 한 기업지배구조업계 관계자는 “강성부 펀드가 이번 주총에서는 무릎을 꿇었지만 주주들에게 행동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실제 올해 주총에선 국내 펀드나 소액주주들을 중심으로 각종 주주제안이 안건으로 상정됐다. 일례로 밸류파트너스자산운용은 현대홈쇼핑을 상대로 자사주를 매입해 소각할 것을 요구하고, 아트라스BX에겐 1주당 1만1,000원의 현금배당을 요구하는 안건을 각 사 주총에 올렸다. 한솔홀딩스 주총에선 소액주주연대가 3%의 유상감자와 사내이사 선임을 제안했다. 현대차, 포스코강판, 세이브존I&C 등의 주총에도 주주제안 안건이 포함됐다. 이처럼 활발한 주주제안은 그간 의결권 행사에 소극적이던 소액주주의 참여를 이끄는 유인으로 작용했다.
달라진 소액주주들 앞에서 기업들은 쓴잔을 들기도 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 실패가 대표적 사례다. 정관상 이사 연임 의결정족수인 3분의 2를 채우기 위해 대한항공 측은 직원들까지 동원해 소액주주(지분 56%) 설득 작업에 나섰지만, 결국 이들의 마음을 충분히 얻지 못해 ‘주주들에 의해 쫓겨난 첫 총수’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결정타 날린 국민연금 앞으로는?
국민연금 또한 올해 주총 시즌의 ‘키플레이어’였다. 스튜어드십코드 도입 후 첫 주총 시즌인 올해 국민연금은 이전과 달리 기업들의 안건에 적극적으로 제동을 걸었다.
국민연금은 의결권 행사 방향을 공개한 121개 기업 가운데 절반을 넘는 68곳(56.1%)의 주총에서 1개 이상 안건에 반대표를 행사했다. 특히 회사 측 인사의 사내이사 선임을 적극 견제하면서 HDC아이콘트롤스(정몽규 HDC그룹 회장), 한세엠케이(김동녕 대표이사), 한글과컴퓨터(김상철 한컴그룹 회장) 등의 이사 선임 안건에 반대표를 던졌다.
조양호 회장의 대한항공 이사진 퇴출 과정에도 국민연금은 결정타를 날렸다. 소액주주들이 조 회장에 불신하고 표를 몰아주지 않아 찬반이 팽팽한 상황에서 이 회사 지분 11.56%을 보유한 국민연금은 조 회장의 이사 연임에 반대하며 사실상 승부를 결정지었다. 한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앞으로 기업 경영에 중요한 정관 변경, 이사 및 감사 선임과 관련해서 대형 주주인 국민연금의 결정이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주주친화적 주총의 등장
소액주주, 행동주의 펀드, 국민연금 등 다양한 주주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선제적으로 주총을 주주친화적 분위기로 조성하는 기업들도 나타났다. 기업에서 일방적으로 상정한 안건을 바로 처리하고 20분 만에 종료되던 예전의 주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풀무원은 주주 200여 명이 참석한 ‘열린 주총’을 열고 지난해 주주들이 제안한 액면분할을 올해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 풀무원은 이날 사업계획을 발표하면서 주요 현안에 대해 임직원과 주주들이 토론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넷마블도 올해 주총에서 지배주주 순이익의 최대 30% 범위에서 배당 또는 자사주를 매입한다는 주주환원 계획을 밝혔다.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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