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업체와 선수금 등 마찰 속 작년 9월 계약 파기 통보 받아
과기부ㆍIBS는 “순조롭게 진행” 홍보에 열 올리다 일정 더 차질
“라온 중이온가속기, 기초과학강국의 꿈 가속한다”(2018년 6월25일)
“기초과학연구원(IBS), 세계적 연구기관으로 도약 추진”(2018년 7월13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해 6,7월 “한국형 중이온가속기(라온ㆍRAON)를 2021년 구축 완료할 예정”이며 이를 통해 한국의 기초과학 연구 수준이 크게 높아질 거라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보도 자료를 잇따라 냈다. 그런데 당시는 과기정통부와 IBS, 중이온가속기의 핵심 장비인 사이클로트론을 공급하는 캐나다 베스트사(社)의 의견 충돌로 계약이 파기 단계에 들어갔던 때다.
2017년 4월 사이클로트론 공급 계약을 맺은 베스트는 당초 계약서에 명시된 내용과 달리, 현지 은행 보증도 서지 않은 채 선수금을 달라고 요구해 IBS와 마찰을 빚었다. 지난해 7월2일에는 IBS에 이메일을 보내 “1달 안에 계약을 변경하지 않으면 사이클로트론 구매 의사 없는 걸로 알겠다”고 통보했다. 베스트는 IBS가 빔라인(입자의 이동 통로)의 세부사양을 늦게 알려줘 사이클로트론 제작 일정이 미뤄졌다며 기존 1,335만달러였던 사업비를 1,760만 달러로 높여달라고 했다. 그러나 IBS는 베스트의 국내 에이전트에 두 차례 공문을 보내 계약조건의 ‘수정 불가’ 입장을 알렸다. 그러자 베스트는 9월6일 이메일로 “사이클로트론 공급 계약을 취소하겠다”고 통보했다.
이후 IBS는 “계약상대자(베스트)의 계약 이행 가능성이 없고, 중이온가속기 구축 사업 전체 일정에 지장을 초래한다”며 베스트 측 국내 에이전트와 조달청에 사이클로트론 공급계약 해제 검토를 요청했다. IBS와 상위 기관인 과기정통부 모두 사이클로트론 납품 문제로 한국형 중이온가속기의 2021년 운행 계획에 차질이 불가피한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앞서 지난해 7월 대전에서 연례 회의를 가진 중이온가속기 국제자문위원회 역시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사이클로트론 문제는 이 프로젝트 일정을 위협하는 최대 위험요인인 만큼 공급 지연을 막기 위한 긴급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최종보고서에 냈다.
그런데 정작 사업 당사자인 과기정통부와 IBS는 계약파기 가능성을 우려한 국제자문위원회의 최종 의견 등을 무시하고, ‘한국형 중이온가속기 구축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내용의 보도 자료를 연이어 내는 등 사업 홍보에만 열을 올린 것이다. 과학계에선 이미 한국형 중이온가속기 완공 시한이 두 차례나 연기됐던 만큼 또 다시 사업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상황을 쉬쉬했던 것이 결국 일을 더 키웠다는 지적이 나온다.
총 사업비 1조4,314억원의 막대한 혈세가 투입된 ‘단군 이래 최대 기초과학 프로젝트’로 불렸던 중이온가속기 구축 사업은 완공 일정을 맞추기 위한 ‘무리수’도 적잖았다. 앞서 IBS는 캐나다 국립입자핵물리연구소(TRIUMF)에 2014년 용역을 맡겨 초전도선형가속기(SCL2)에 들어가는 초전도가속관(SSR1ㆍ2) 중 SSR1 시제품 2개를 받기로 했다. 입자를 가속시키는 역할을 하는 SCL2는 한국형 중이온가속기를 구성하는 세 종류의 초전도선형가속기 중 하나다.
하지만 TRIUMF에서 만든 SSR1 시제품이 성능 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는데도 이 제품의 설계를 살짝 변경해 지난해 4월 국내 업체에 또 다른 시제품 제작을 맡겼다. 당초 밝혔던 구축 일정에 맞추는 것이 어렵게 되자 부랴부랴 다른 업체에 맡긴 것이다. 한 국내 대학 교수는 “설계변경을 하더라도 성능이 제대로 나올지 장담하긴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권현준 과기정통부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추진단장은 “리스크를 분산해 안정적으로 부품 공급을 받기 위한 조치”라고 해명했다.
SCL2에 들어가는 또 다른 초전도가속관인 SSR2도 국내 업체(지난해 8월)와 중국 고에너지물리학연구소(IHEPㆍ올해 3월)에 연이어 시제품 제작 용역을 맡겼다. IHEP의 SSR2 시제품 납품 기일은 2020년 11월이다. 그런데도 IBS는 2019년 사업계획안에서 올해 안에 SCL2에 들어가는 두 가속관의 시제품 제작과 성능시험을 모두 마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일정에 차질이 빚어진 SSR1 개발 선례를 감안하면 현실성이 떨어진다. 가속기물리학을 전공한 한 국내 연구원은 “가속관 개발이 제대로 됐으면 예산을 중복으로 쓰면서 시제품 제작을 맡길 이유가 없다”며 “IHEP에서 시제품을 성공적으로 만들더라도 성능 검증부터 양산, 운송, 설치 등의 과정을 고려하면 SCL2 구축은 한국형 중이온가속기의 완공 목표 시점인 2021년을 넘길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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