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소설 ‘막다른 골목의 추억’ 한국 신예 최현영 감독에 맡겨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다. 상처도 언젠가는 아문다. 슬픔도 때론 살아갈 힘이 된다. 어디선가 힘겨운 시간을 건너가고 있을 이들에게 영화 ‘막다른 골목의 추억’(4월 4일 개봉)이 건네는 작은 위로다. 일본의 인기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55)가 쓴 동명 단편 소설을 한국의 신인 감독 최현영(31)이 스크린에 옮겼다. 대가의 담백한 문장과 신예의 서정적인 영상이 어우러진 영화는 수채화처럼 투명하다. 한국 관객과의 만남을 앞둔 요시모토 작가와 최 감독을 지난 25일 서울 광화문의 한 극장에서 함께 만났다.
요시모토 작가는 2000년대 초ㆍ중반 일본 문학 열풍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키친’과 ‘아르헨티나 할머니’ ‘바다의 뚜껑’ 등 이미 여러 대표작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막다른 골목의 추억’은 작가 스스로 “지금까지 쓴 소설 중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라고 주저 없이 꼽는 작품이다. 일본에서도 여러 차례 영화화 제안을 받았지만, 그는 한국의 낯선 신인 감독을 택했다. “제가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무척 좋아해요. 한국 창작자라면 믿고 맡길 수 있겠다 싶었어요. 기획안도 신뢰를 줬고요.” 최 감독은 영화 전공 학생이던 2010년 아이치국제영화제 워크숍에서 단편 영화를 만들면서 인연을 맺은 제작자에게서 지난해 1월 이 프로젝트에 대해 들었다. 그 길로 서점으로 달려갔다. “책장 앞에 선 채로 소설을 읽었는데 눈물이 났어요. 그런데 그 눈물이 꼭 반짝거리는 것만 같았어요.”
영화는 일본 나고야로 약혼자를 만나러 간 주인공 유미(최수영)가 약혼자에게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시작된다. 갑작스러운 이별에 낯선 도시를 방황하던 유미는 우연히 막다른 골목에 있는 카페 엔드포인트에 들어서게 되고, 카페 주인 니시야마(다나카 슌스케)와 다정한 동네사람들을 만나며 점차 상처를 회복해 간다. 소설에는 묘사되지 않은 이웃들의 사연이 새로이 담기면서 영화는 소설보다 밝고 포근한 이야기가 됐다. 영화는 지난달 일본 나고야, 도쿄, 오사카, 교토 등에서 개봉해 호평받았다.
요시모토 작가는 “소설은 다소 어둡고 가라앉은 분위기인 데 반해 영화는 감성적이면서도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아서 무척 좋았다”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최 감독은 “나고야 촬영장에 작가님이 응원차 와주셨는데 큰 감동을 받았다”며 “원작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고 화답했다. 요시모토 작가가 처음 들려준 뜻밖의 고백은 최 감독을 뭉클하게 했다. “사실 저는 이 영화 시나리오도 안 봤어요. 다른 작품의 경우엔 다 봤지만요. 그만큼 최 감독을 믿었어요.”
소녀시대 출신 최수영은 성장통을 겪는 유미 역에 맞춤이다. 열두 살 때 일본에서 데뷔한 그는 일본어 대사도 매끄럽게 소화한다. 최 감독은 MBC 드라마 ‘내 생애 봄날’(2014)에서 인상 깊게 본 최수영을 1순위로 캐스팅했다. “그즈음 수영씨도 배우로 새 출발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여러 작품에서 수영씨의 성장을 지켜보며 평소 기대감을 갖고 있었죠. 이렇게 만난 게 운명처럼 느껴져요.” 요시모토 작가도 최수영의 연기에 만족스러워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면서 구김살 없이 잘 자란 캐릭터예요. 수영씨는 가수로 활동하면서 힘든 경험을 많이 했을 텐데도 유미가 자기 자신인 듯 자연스럽게 표현해 줬어요.”
유미와 달리 니시야마는 불운한 가정사를 갖고 있다. 그 상처를 딛고 일어났기에 속이 깊고 단단하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 커다란 원을 그려가면 돼. 지금은 많은 사람 중 하나가 인생에서 빠져나간 것뿐이야.” 니시야먀의 위로는 유미를 일으켜 세우고 관객의 마음까지 보듬는다. 요시모토 작가의 삶에 대한 통찰이 니시야마에 투영된 듯하다. “실연의 상처는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해도 남아 있어요. 제 경험이 녹아들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저는 이 소설을 임신했을 때 썼어요. 아이를 낳으면 슬픈 이야기는 못 쓸 같아서 조바심을 냈죠(웃음). 소설은 주인공이 나쁜 것들로 들어찬 상자를 잠시 열어 보는 이야기예요. 그 안을 한 번이라도 들여다본 사람은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상자 속 고통에 비하면 그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대학 졸업 후 5년간 영화 수입ㆍ배급사에서 일하다 영국 유학을 떠난 최 감독은 잠시 한국에 머물던 중에 연출 제안을 받았다. 그는 일상으로 돌아간 유미의 대사 “인생 최악의 순간, 나를 살린 행복”을 곱씹었다. “유미처럼 저도 막다른 길에서 이 작품을 만났어요. 꿈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아 좌절하던 때였죠. 현실에서 도망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니 새로운 힘이 솟더라고요. 지금 괴롭더라도 앞으로 다가올 행복을 기대하면서 살아가자고,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도 이야기를 건네고 싶어요.”
요시모토 작가는 “앞으로도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힘을 북돋아주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최 감독도 “고통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여성들에 대한 영화를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의 꿈이 맞닿는다. 그렇다면 언젠가 가까운 미래에 다시 한 번 소설과 영화로 교감하게 될까. 최 감독은 “작가님의 ‘하드보일드 하드 럭’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수줍게 욕심을 냈다. 요시모토 작가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며 뜻밖의 약속을 했다. “그 영화는 제가 시나리오를 쓸게요. ‘막다른 골목의 추억’으로 큰 선물을 받았으니 저도 보답하고 싶어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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