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재검열 수난 겪은 이규환 감독 데뷔작 ‘임자 없는 나룻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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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환(1904~1982) 감독의 ‘임자없는 나룻배’(1932)는 첫 상영부터 우여곡절을 겪었다. 동아일보의 학예부장으로 근무하던 소설가 주요섭(‘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로 유명하다)이 사전 시사회를 보고 석간에 쓴 평이 총독부 도서과의 검열에 덜컥 걸리고 말았다. “이 작품은 조선 민족의 한, 통분, 울분이 뛴다”는 주요섭의 평은 벅찬 감동을 끌어안고 쓴 진심어린 칭찬이었지만, 본의와는 다르게 영화를 곤경에 빠뜨린 꼴이 되었다. 신문은 발매금치 처분을 당했고 27세의 신인감독은 영문을 모른 채 “검열계에서 급히 필름을 갖고 오라”는 말을 듣고 극장 영사기에 걸린 필름을 빼서 화급히 광화문의 조선총독부로 달려갔다.
영화에 관한 총독부의 검열은 독립운동가나 사상범을 취조하는 일 못지않게 가혹한 것이었다. ‘항일영화’라는 의심을 받은 영화는 가위질로 잘려나가면 그나마 다행이었고, 심하면 필름을 압수당해 불태워지기 일쑤였다. 검열주임이 문제 삼은 건 영화의 엔딩 장면과 제목이 담고 있는 함의였다. 주연을 맡은 나운규가 임진강 철교의 철로를 도끼로 때려 부수는 장면은 사전검열에서부터 300자 분량을 들어냈지만 다시 문제 삼았고, ‘임자 없는 나룻배’는 곧 나라 잃은 민족을 은유하고자 함이 아닌가를 의심받았다. 표를 구한 관객이 단성사 밖을 메우고 있는 판에 재검열로 발목이 잡혀 영화의 상영 시간은 시시각각 미뤄지고 있었다.
문제의 장면을 통으로 잘라버리겠다는 검열주임의 말에 감독은 “만약 이 라스트씬이 잘린다면 나는 죽습니다!” 대성통곡하며 시멘트 바닥을 뒹굴었다고 한다. 이를 지켜본 검열주임은 더 이상 강요하지 못하고 150자 분량을 더 잘라내는 선에서 재검열을 마무리 지었다. 단성사 간부가 발을 동동 구르는 가운데, 첫 상영은 예정이었던 오후 7시에서 40분을 넘겨 겨우 성사될 수 있었다. 일본이 문화정책을 거두고 문화말살 정책을 추진하던 엄혹한 시기, 이 ‘재검열 소동’은 한국영화사의 전설이 되었다.
◇관객이 뽑은 최고 무성영화 2위
‘항일영화’의 혐의를 받았던 ‘임자없는 나룻배’의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정춘삼(나운규)은 가뭄과 수해가 겹쳐 농부로서 살 길이 막막해지자 아내와 상경해 인력거를 끈다. 만삭이 된 아내의 병원비를 구하지 못해 돈을 훔친 그는 순사에게 붙잡히고 아내는 길거리에서 딸을 낳는다. 수감 생활을 마치고 감옥을 나온 춘삼은 자동차 운전수와 동거 중인 아내로부터 딸을 빼앗아 안고 고향으로 돌아와 뱃사공 일을 한다. 10년이 지나 딸 애연(문예봉)은 아버지의 뱃사공 일을 도울 만큼 성장하지만, 강가에 철교가 건설되면서 부녀의 삶은 위태로워진다. 손님을 태워주고 받는 배 삯으로 먹고 살던 생계가 끊기게 된 것이다. 이런 판국에 철교의 공사장 감독(임운학)이 딸을 욕보이자, 격분한 춘삼은 사투를 벌여 그를 도끼로 쳐 죽이고 철로를 때려 부수다 달리는 열차에 치여 숨지고 만다.
하층민으로 힘겨운 삶을 살다 가족과 생계마저 파괴당한 춘삼의 처절함은 이등국민으로 짓밟히며 갖은 설움을 견뎌야 했던 민족의 비애와 울분을 대변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동아일보 1932년 9월 14일자에서 허심은 ‘나운규가 연기하는 춘삼이란 한 개 농부 노동자의 슬픈 이야기를, 우리 한 개인의 이야기로 보지 말고 조선민족이라는 한 민족의 이야기로 볼 때 비로소 그 감격이 커지는 것’이며 주인공 춘삼을 ‘조선민중의 한 전형‘이라고 평한다. 일본 신문 호치(報知)에서 ‘사실주의 기법이 두드러진 가작’이라 평한 대목 또한 눈여겨볼만하다. 조선 영화가 일본 영화에 밀리지 않는 수준의 완성도와 작품성을 획득했음을 알리는 쾌거이기도 하지만, 1930년대 강점기의 냉엄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담아냄으로써 한국 영화의 리얼리즘을 선취했다는 데에도 큰 의의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철교와 열차로 대변되는 근대화의 물결에 떠밀려 조선의 공동체와 전통 문화가 해체되어가는 시대의 풍경을 이규환은 예민한 시선으로 포착해 영화로 승화해낸 것이 아니었을까.
’임자 없는 나룻배‘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단식투쟁을 벌여가며 아버지의 돈을 끌어와 2,000원의 제작비를 마련한 제작자 강정원은 돈방석에 앉았고, 입봉작 단 한 편으로 이규환은 유명인사가 되었다. 훗날의 일이지만 1938년 11월 조선일보가 주최한 ‘제1회 영화제’(한국에서 연 최초의 영화제였다)에서 5,000명의 관객을 대상으로 집계한 무성영화 베스트 10에 ‘아리랑’에 이어 2위로 선정될 만큼 ‘임자 없는 나룻배’는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다만 영화가 겪을 수난은 끝난 게 아니었다. 지방의 극장에서 상영할 때는 엉뚱하게도 변사들이 경찰에 붙잡혀 곤욕을 치렀다. 춘삼이 도끼로 철로를 찍어내는 장면에서 변사들은 달려오는 열차를 두고 ’검은 그림자‘라고 해설하곤 했는데, 임검석의 경찰이 이걸 듣고 일본을 빗대는 표현이 아니냐며 트집을 잡아 심문하곤 했던 것이다.
◇가난 속에서도 영화감독 꿈꿔
이규환의 인생 역정은 영화 못지않게 파란만장했다. 어머니가 만석꾼이던 고모부의 집에 의탁해 가정부로 일하게 되면서 서울로 상경한 그는 보정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의숙에 진학한다. 고모부 집안의 몰락으로 서울에서의 생활은 8년에 그쳤지만 우미관과 단성사를 드나들면서 영화를 알게 된 이규환은 어머니의 삯바느질로 근근이 학업을 이어가는 처지였음에도 영화인을 꿈꾸게 된다. 3ㆍ1 운동의 여파로 항일시위에 참가했다가 2년간 밀양으로 도피한 그는 대구로 돌아와서 D. W. 그리피스의 영화(‘동부 저 멀리’(1920)로 짐작된다.)를 접하게 되는데 주인공의 심리적 갈등 묘사에 이끌린 것이 감독이 되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도쿄에 건너가 신문배달을 하며 영화예술연구소에서 6개월 간 공부했음에도 부족함을 느낀 이규환은 영화의 중심지인 미국으로 건너갈 작정을 하고 상하이로 향한다. 11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소설가 김광주, 영화감독 전창근과 이경손 등을 알게 되었지만 고생하면서 쓴 첫 시나리오 ‘영육난무’는 영화화를 거절당하고 별다른 활로를 찾지 못했다. 미국행이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일본 영화의 중심지인 교토로 넘어가 신흥키네마의 연구생으로 입사하게 된다. 3년 동안 일하면서 알게 된 인맥은 나중에 합작영화 ‘나그네’(1937)를 연출할 때 큰 도움이 된다. 이후 귀국한 이규환은 조선일보 학예부장 안석영의 도움으로 지면에 시나리오 ‘탄식하는 해골’을 게재하고, 여세를 몰아 ‘임자 없는 나룻배’의 시나리오를 완성해 입봉의 꿈을 이루게 된다.
이규환은 뜻이 큰 영화감독이었다. 그는 단순히 영화를 만드는 직업인이 아니라 당대의 조국을 위한 의식 있는 작업을 하는 작가가 되고자 했다. 청년들의 농촌계몽운동을 그린 ‘밝아가는 인생’(1933), 동해안 어촌 어부가족의 삶을 그린 ‘바다여 말하라’(1935)는 흥행에 재미를 보진 못했지만 그 내용의 면면을 살피면 ‘임자 없는 나룻배’의 연장선상에서 현실의 풍경, 시대의 공기를 담아내려 한 리얼리스트의 면모가 엿보인다. 한일 합작 ‘무지개’(1936)와 유성영화 ‘나그네’에도 이규환의 색채는 일관되게 묻어나 있다. 그러한 그가 강점기 말기 일본의 영화정책에 협조하지 않은 건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창공’(1941)을 마치고 이규환은 광복의 날이 오기까지 한동안 영화계를 떠나 있게 된다. 유현목 감독이 “나의 영화정신은 조감독 시절 이규환 감독으로부터 배웠다”한 데는 이처럼 꼿꼿한 인물 됨됨이로부터 받은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이규환은 친일 어용 영화의 양산을 위해 설립된 조선영화통제회사에 대한 협조를 거부하고 평택 비행장 공사의 인부로 1년 5개월 간 징용을 살아야 했다. 해방 조국을 맞이한 날, 서울로 돌아와 만세를 불렀던 이규환은 동료였던 전창근과 안석영을 만나 밤새 술잔을 나누며 함께 울었다고 한다. “이젠 정말 우리나라 영화를 만들자”고 세 사람은 다짐했다. 긴 어둠을 뚫고서 한국영화의 새로운 여명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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