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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수 경영권 첫 박탈… 국민연금의 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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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수 경영권 첫 박탈… 국민연금의 위력

입력
2019.03.28 04:40
수정
2019.03.28 09:21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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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호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 부결… 스튜어드십코드 도입 후 첫 사례

소액주주들도 힘 발휘… 국민연금, 향후 주총 영향력 강화 예고

펀드 자본주의, 총수 전횡 방지… 정부 입김 ‘경영 안정 위협’ 우려도

우기홍 대한항공 대표이사 부사장이 27일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대한항공 주주총회를 진행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우기홍 대한항공 대표이사 부사장이 27일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대한항공 주주총회를 진행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에 제동이 걸렸다. 국민연금이 지난해 7월 대주주의 전횡을 막기 위해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지침)을 도입한 이후 갑질ㆍ위법 논란에 휩싸인 대주주의 경영권을 박탈한 첫 사례다. 펀드가 기업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펀드 자본주의’의 위력이 고스란히 드러난 셈인데, 대기업 총수라도 기업가치를 훼손했을 경우 이를 견제하고, 경영권까지 박탈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다만 정부 입김에서 자유롭지 않은 국민연금이 재벌 개혁에 활용되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27일 열린 대한항공 정기 주주총회에서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안은 의결권 있는 주식 73.84%를 가진 주주가 표결에 참여해 찬성 64.1%, 반대 35.9%로 부결됐다. 대한항공은 정관에 따라 이사 선임과 해임을 특별 결의사안으로 분류하고 주총 참석 주주의 3분의 2 이상 동의(66%)를 받도록 하고 있다.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의 전날(26일) 반대 결정이 캐스팅보트 역할을 했다. 대한항공 지분 11.56%을 보유한 국민연금은 조 회장 일가 등 특수관계인(33.35%)에 이은 2대 주주다. 조 회장 입장에선 2.6%의 지분을 추가로 확보하지 못해 사내이사 직에서 물러나게 됐는데 34.59%에 달하는 소액주주 등 기타주주의 힘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국민연금, 기업 주총에서 향후 영향력 강화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코드를 통해 조 회장의 대한항공 경영권을 박탈하면서 다른 대기업들도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됐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조 회장이 실제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에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한 전문가는 많지 않았다. 그간 주총에서 국민연금의 영향력은 ‘종이 호랑이’로 불릴 만큼 미미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투자 규모는 지난해 3월 기준 코스피ㆍ코스닥 시가총액의 7%에 달하지만, 기업별 지분율은 10% 초반에 불과하다. 때문에 지난해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던진 주총 안건 607개 가운데 실제로 부결된 경우는 단 7건(1.2%)뿐이었다. 대주주의 이사 재선임 안건에 대해서도 국민연금은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2011년),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2016년),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2016년)에 여러 차례 반대표를 던졌지만 연임에 실패한 경우는 이전까진 없었다.

하지만 이번 대한항공 주총을 계기로 국민연금이 향후 기업 주총에서 내리는 결정이 소액주주는 물론, 기관투자자의 입장을 정하는 신호로 작용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의결권 자문사인 서스틴베스트의 류영재 대표는 “대한항공 주총 하루 전에서야 국민연금의 입장이 결정돼 이번에는 영향력이 적었다”면서도 “지분율 10% 이상이거나 전체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가 넘는 기업에 대해 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에 대한 사전공시를 시작한 만큼 갈수록 시그널 효과가 강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기업 총수들도 국민연금의 눈치를 보게 되면서 사익추구를 삼가고 주주가치를 극대화하는 경영을 펼칠 가능성이 커졌다는 분석이다. 박경서 고려대 교수는 “지금까진 국민연금 담당자가 만나자고 해도 대기업들이 코웃음 쳤지만 앞으로는 중점관리기업으로 선정되지 않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행동을 해명하게 될 것”이라며 “기관투자자들 역시 투자자들로부터 왜 국민연금과 다른 방향으로 의결권을 행사했는지 문의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펀드 자본주의’ 위력 발휘…우려도 상존

대한항공 주총을 계기로 이른바 ‘펀드자본주의’의 위력이 제대로 과시됐다는 평가가 나오는데 이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펀드자본주의는 펀드가 기업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새 권력으로 등장한 20세기 후반 이후의 자본주의 특성을 가리킨다. 펀드가 경영에 참여하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서다. 단순히 주식시장에서 매매를 통한 시세차익만 노리기보다, 투자한 기업의 경영에 참여해 기업가치를 끌어올려 수익을 내려는 것이다. 국내에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인 장하성 고려대 교수가 2006년 이끈 ‘한국지배구조펀드(일명 장하성펀드)’를 시작으로 펀드자본주의 움직임이 일었다. 장하성펀드는 태광산업 대표이사 해임 소송, 한솔제지 사외이사 선임 등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 주목 받았다.

그러나 기업의 투명성을 높일 수 있다는 의견과 기업의 경영 안정성을 위협할 수 있다는 주장이 상충하고 있다. 특히 ‘연금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높다. 국민연금 기금위원회 구성상 정부나 정치권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수탁자책임위가 검토한 사안이라도 최종 결정권은 기금위에 있다. 기금위 위원장은 보건복지부 장관이고, 당연직 위원 4명 역시 정부 부처 차관이다. 박 교수는 “해외 연기금들은 상설조직을 갖추고 독자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한다”면서 “기금위의 간섭을 끊고 수탁자책임위의 권한과 책임을 동시에 강화해 정부 개입 논란을 차단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대한항공 주총 결과에 환영의 뜻을 밝혔다. 참여연대는 논평을 내고 “기업이 전근대적 권력을 휘두르는 재벌 총수 일가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라고 주장했고,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기업과 주주가치를 심각히 훼손한 총수 일가와 경영진은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경영문화가 자리 잡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도 이날 국회 정무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스튜어드십코드 도입의 긍정적인 면을 잘 보여줬다”며 조 회장 연임 부결 뒤 오히려 대한항공 주가가 급등하는 등 시장은 이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평가에 동의했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ankookilbo.com

김민호 기자 kmh@hankookilbo.com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장재진 기자 blan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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