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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적에서 친구로 가는 길의 어려움

입력
2019.03.28 04:40
수정
2019.03.28 14:2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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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기호학자이자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의 ‘적을 만들다’의 한 구절이다. “적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치 체계를 측정하고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그것에 맞서는 장애물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따라서 적이 없다면 만들어 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정치의 본질이 적과 친구의 구분이라는 정의를 떠올리게 한다. 베트남의 하노이에서 2019년 2월 27~28일 열린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이 합의문 없이 끝났을 때, 에코의 말을 찾았다. 에코는, 소련이란 적이 사라지고 오사마 빈 라덴이란 적이 새로이 발견될 때까지 미국의 정체성이 흔들렸음을 지적한다.

적이 우리의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에서 필요한 악이라면, 적에서 친구가 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일까. 북미 정상회담의 장소였던 베트남은 미국과 전쟁을 했지만 현재는 친미 국가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을 수 있다면, 또는 위험한 길이지만 새로운 적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철천지 원수도 친구가 된다. 국제사회에서는 폭력의 사용을 통제하는 정치적 권위체가 없기 때문에 적대적 관계가 전쟁으로 비화되곤 한다. 그러나 어느 한편이 다른 한편에 대해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을 때 또는 상대방을 압도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적에서 친구로 가는 ‘평화과정’이 시작된다.

2017년 4월과 8월 전쟁 위기를 거치며, 2017년 말부터 한반도 평화과정이 재개되었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은 그 과정의 한 구성 요소다. 2018년 2월의 북미회담은 결렬되었지만, 비교평화과정의 시각에서 본다면 긍정적 요소도 있다. 한반도 갈등의 핵심이 안보 딜레마란 사실에 서로 동의했기에, 한반도 평화과정의 원점인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 중단과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중단을 교환하는 합의를 지키기로 약속했다. 한반도에서는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군사적 도발이 발생하지 않고 있다. 만약 쌍방이 이 약속을 어기면 한반도 평화과정은 중단될 수밖에 없다. 최소의 공통분모에 대한 재확인이 하노이 회담의 최대 성과다.

지속가능한 평화과정을 위해서는 갈등하는 당사자들이 핵심 쟁점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하노이에서 북미는 한반도 비핵화를 둘러싼 서로의 차이를 확인했다. 2018년 9월 남북 정상이 합의한 북한의 영변 핵시설의 폐기만으로, 미국은 북한에 상응하는 군사적, 외교적, 경제적 조치를 취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미 평화선언과 연락사무소 설치, 북한에 대한 유엔안보리 제재의 부분적 해제와 영변 핵시설 폐기를 교환하는 거래가 성사되지 않게 된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에 미국이 한미동맹에 근거하여 한국에 제공하는 핵우산의 제거가 포함되는지의 여부도 쟁점의 하나였다는 주장도 있다. 미국은 영변 플러스 알파를 폐기의 대상으로 요구했다. 그 알파가 북한의 우라늄 농축 시설이라면, 핵기술의 평화적 이용권도 쟁점이 된 셈이다. 한반도 평화과정에서 한반도 비핵화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정상 수준에서의 다툼 그 자체가 하노이 회담의 두 번째 성과다.

적에서 친구로 가는 길은 지난한 과정이다. 한반도 평화과정에는, 한국전쟁에서 비롯된 남북미중의 적대와 탈냉전시대 한반도 핵문제가 얽혀 있다. 그 가시밭길에는 서로를 적으로 만드는 것에 이해관계를 가진 정치세력이 남북미중 내에 포진해 있다. 국제적 수준에서, 한반도 갈등의 당사자들이 공동의 적을 만들어 친구가 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은 경로다. 한반도 갈등의 당사자인 한국이 평화과정을 중재하는 모순적 역할을 감당하고자 한다면, 평화과정이 장기 지속의 과정임을 고려하면서, 핵심 쟁점인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정의가 포함된 한반도 평화체제의 모습을, 즉 한반도의 중단기 미래에 대한 설계도를 제시하는 기획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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