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는 성범죄 용의자에게 다소 우스꽝스러운 논두렁 발차기를 선뵈며 일갈한다.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야?” 여기가 강간의 왕국인 건 아니다.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왕이란 존재는 없으므로, 왕국보다는 강간의 공화국 정도가 더 적정한 용어일 테다.
검사 출신으로 법무부 차관까지 지낸 중년 남성은 약물 투여 정황까지 의심되는 성폭행 및 불법 촬영 혐의를 지난 정권에서 석연치 않게 벗었다가 지금에야 재수사 위기에 처했다. 거대 언론사 사주, 재벌 등으로 이루어진 중장년 남성 무리는 무명 연예인을 성적으로 착취하여 자살에까지 이르게 했다는 강한 의심을 받고 있다. 연예인, 사업가 등 청년 남성 몇은 불법 촬영한 성관계 동영상을 채팅방에서 돌려 보았으며, 그들과 관계된 여러 클럽에서는 약물 강간이 성행한다는 루머가 신빙성을 얻고 있다. 일부 계층의 권력형 범죄를 두고 강간 공화국을 운운함이 조금 심하다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공화국의 증거는 차고 넘친다.
일부 남초 커뮤니티와 포르노사이트에서 ‘국산’이라는 말은 불법 영상을 뜻하며, 피해자의 극단적 선택이 알려지면 해당 영상을 ‘유작’이라고까지 부른다. 포털사이트에서는 ‘○○대학 김** 유출본’이라고 운을 띄우는 성인사이트 광고 댓글이 여전히 버젓하다. 성범죄 영상과 사진을 공유했던 불법 사이트 ‘소라넷’의 회원 숫자는 100만명에 이르렀었다. 이는 최근 통과된 지방자치법에 따라 ‘특례시’로 지정될 수 있는 숫자이며, 수원시, 고양시 등이 이에 해당하고, 성인 남성 20여명 중 1명으로 추산이 가능한 수치이기도 하다. 멀쩡한 IT 기업으로 보였던 웹하드 업체는 불법 영상을 푼돈에 팔아 수백억 매출을 안정적으로 거뒀다. 소라넷에 가입한 남성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일반적인(!) 남성들이 웹하드에서 이른바 ‘국산’을 다운받아 자위라는 이름의 사이버 강간의 용도로 지불한 돈으로 추론된다. 공화국의 시민은 이토록 멈추지 않는다.
어느 40대 남성은 중학생인 딸을 성폭행해 출산에 이르게 하고, 태어난 영아를 유기하였다. 성폭력 피해자로서 보호시설에 입소했던 지적장애 고등학생은 출소하자마자 또다시 성폭행을 당했다. 기간제 교사인 30대 남성은 중학생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하여 징역 9년을 선고받았다. 다른 40대 남성은 한집에 살고 있는 처제를 8년에 걸쳐 강간하여 징역 15년을 구형받았다. 다른 남성은 캄보디아 출신 아내의 동생, 그러니까 처제를 상습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피해자가 소리치거나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러한 성범죄를 수사해야 할 수사기관은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주요 부위를 그려보라.” “피해 당시의 자세를 취해 보라”고 요구했다. 공화국의 문화는 이토록 융성하다. 바꿔 말해 강간 문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나만은, 공화국의 시민이 아닐 것 같은가? 권력에 취해 별장에 여성을 감금해 성폭행하고 동영상을 찍은 자와, 불법 영상을 단 한 번이라도 모니터에 재생해 그 알량한 성기를 만지작거린 자는 기본적으로 같은 혐의다. 동료 학생을 성추행하고 이를 휴대전화로 촬영했던 유명 사립대 남자 의대생과 남성 선후배 모임을 만들어 같은 학교 신입생들의 사진을 PPT 파일로 만들어 평가한 남자 교대생도 같은 혐의다. ‘빨간 마후라’를 본 남성 모두가 같은 혐의다. 피해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자도 같은 혐의다. 야릇한 사진을 자사 홈페이지 광고 배너로 걸어놓은 언론사도 같은 혐의다.
그러나 일등시민들이여, 걱정 마시길. 모든 혐의는 공화국에서 무죄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바로, 강간의 공화국이기 때문이다.
서효인 시인ㆍ문학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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