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작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 29일 왓챠플레이에서 공개
“소설 ‘리틀 드러머 걸’을 읽자마자 깨달았어요. 존 르 카레의 작품 중 단연 최고라는 것을.” 10대 때부터 ‘첩보 소설의 대가’ 존 르 카레의 열혈 팬이었지만 그의 소설 때문에 드라마 연출을 하게 될 줄은 박찬욱(56) 감독 자신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영화감독이기 전에 한때 평론까지 했던 영화 마니아이며 누구보다 극장을 사랑하는, 심지어 별명마저 ‘깐느박’인 그가 아닌가.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OTT) 왓챠플레이에서 29일 공개되는 6부작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은 그런 의미에서 박 감독의 ‘두 번째 데뷔작’인 셈이기도 하다.
박 감독을 사로잡은 ‘리틀 드러머 걸’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이 격화되던 1979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포섭돼 스파이가 된 영국의 무명 배우 찰리(플로렌스 퓨)와 정보요원들의 비밀공작을 그린다. 모사드 고위 요원 마틴 쿠르츠(마이클 섀넌)가 짜놓은 설계도에 따라 찰리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미셸의 연인으로 위장해 현실이라는 무대 위에서 목숨 건 연기를 하고, 미셸 역으로 임무에 나선 비밀요원 가디 베커(알렉산더 스카스가드)와 사랑에 빠진다. 26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마주한 박 감독은 “서구 냉전시대 직업 스파이들의 냉혹하고 비정한 세계를 다룬 이야기를 좋아했다”며 “주인공이 배우인 ‘리틀 드러머 걸’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다 아내의 권유로 뒤늦게 읽었는데 현실과 허구, 진짜와 가짜 사이에 놓인 주인공들에 완전히 매료됐다”고 말했다.
2016년 ‘아가씨’의 경쟁부문 진출로 칸국제영화제를 방문했을 때 소설 판권을 소유한 제작사 대표이자 르 카레의 아들인 사이먼 콘웰을 직접 만나 연출 의사를 전했다. 영화가 아닌 드라마를 택한 것도 원작의 방대한 서사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엔딩크레디트 각본자에 박 감독 이름이 실리지는 않았지만 대사 한 줄 한 줄까지 직접 매만졌다. 영국과 그리스, 체코를 가로지르며 찍었다. 전 세계 최초로 그리스 유적지 아크로폴리스에서 밤 촬영도 했다.
지난해 영국 공영방송 BBC와 미국 케이블채널 AMC에서 방영돼 호평받았다. 하지만 박 감독은 만족하지 못했다. BBC는 폭력 묘사에, AMC는 욕설과 노출 장면에 엄격한 탓에 걷어내야 했던 장면들을 집어넣고 편집과 음향, 음악, 색보정을 가다듬어 ‘감독판’을 새로 내놓은 이유다. 지난 23일 서울 한 극장에서 열린 ‘전편 정주행 관람’ 행사를 마치고서야 박 감독은 “비로소 기나긴 여정에 종지부를 찍은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한국 시청자와의 만남을 앞둔 박 감독의 얼굴엔 ‘설렘’이 감돌았다. 정치적ㆍ시대적 혼란상과 주인공들의 정체성 혼란이 중첩돼 빚어내는 함의를 설명할 때는 특히 그랬다. “찰리는 직업이 배우이면서 또한 스스로 극적인 가정사를 꾸며내 그 허구 안에서 살아왔어요. 반대로 가디는 찰리가 완벽하게 연기하도록 테러리스트 역할을 수행하면서 스스로 만든 가상 세계에 동화돼요. 찰리에게 애정을 느낄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아픔까지 이해하게 되죠. ‘리틀 드러머 걸’은 두 사람의 이런 면모를 일종의 능력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아주 의미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드라마는 이스라엘ㆍ팔레스타인 분쟁을 균형감 있는 시각으로 다룬다. 원작이 탄탄한 취재를 바탕으로 했고, 찰리 캐릭터도 실제 극좌파 성향 배우였던 르 카레의 여동생을 모티브로 했다. 드라마 각색 과정에서 양쪽 인사들에게 조언도 얻었다. 박 감독은 “분단과 냉전을 겪은 우리가 어느 나라 사람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현재적 이야기”라고 힘주어 말했다.
‘리틀 드러머 걸’은 박 감독이 천착해 온 ‘여성 서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친절한 금자씨’(2005)에선 복수를 통해 성장하는 여성을, ‘박쥐’(2009)에선 욕망을 향해 돌진하는 여성을 다뤘고, ‘아가씨’는 남근주의를 전복시킨 두 여성의 사랑과 해방을 그렸다. 찰리는 이 모두를 아우르면서도 무모하리만치 용감하다. 박 감독은 “이전 여성 캐릭터도 용감했지만 다소 차가웠던 데 반해 찰리는 사랑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뜨거움이 있다”고 말했다. 플로렌스 퓨는 그런 찰리를 닮아 있었다. 박 감독은 영화 ‘레이디 맥베스’(2017)를 보고 그를 캐스팅했다. “퓨는 대담해요. 겁이 없죠. 찰리가 위험한 임무에 가담한 이유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고심했는데, 퓨가 시나리오를 읽는 모습을 보며 걱정을 내려놨어요”
빨강, 노랑, 파랑, 초록 등 원색이 빚어낸 미장센은 각막을 찢을 듯 강렬하다. 박 감독이 특별히 모셔온,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2)의 미술감독 마리아 듀코빅의 손길이다. “활력과 용기, 대담성을 색으로 표현했어요. 원색 의상에 맞춰 대사도 새로 만들어 넣었죠. 모아 놓으니 꼭 텔레토비 같더군요(웃음).”
BBC가 16대9 화면만 허용한 탓에 박 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2000) 이후 고집해 왔던 시네마스코프(2.35대1)를 처음 포기했다. 극장 상영을 희생한 건 “뼈를 때리는 고통”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리틀 드러머 걸’은 1, 2회 언론시사회 이후 ‘극장에서 봐야 하는 드라마’라는 평을 받고 있다. ‘OTT 시대’는 박 감독에게도 딜레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니 적응해야겠지만 웬만하면 극장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리틀 드러머 걸’처럼 안 만들고는 못 살겠다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 또는 제작비 마련이 OTT에서만 가능할 때라면 모르겠지만요. ‘리틀 드러머 걸’도 웬만하면 스마트폰 말고 태블릿PC나 TV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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