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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C] 반일의 아이러니

입력
2019.03.25 18: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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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C’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100주년 3ㆍ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마친 뒤 자리로 향하고 있다. 뉴스1
문재인 대통령이 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100주년 3ㆍ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마친 뒤 자리로 향하고 있다. 뉴스1

여당 주도로 희극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경기 도내 각급 학교 비품에 ‘전범(戰犯) 기업이 만든 제품’이라는 스티커가 붙을 뻔했다.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 인식을 확립시켜주고 싶었다”는 게 조례를 제정하려 한 경기도의회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내세운 이유라고 한다. 다행인지 유력 우파 신문의 조소 가득한 폭로 덕에 저 시대착오적 반일(反日)은 미수에 그칠 듯하다. ‘국가원수를 모욕한 매국(賣國)’이라는 수사로 ‘검은 머리 외신 기자’를 비아냥댄 민주당 대변인은 애국을 빙자한 권위주의에 인종주의 혐의까지 받으며 세간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근 10년간의 이명박ㆍ박근혜 정권 때만 해도 생소했던 여권의 일사불란함에는 파시즘(전체주의)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스스로 그렇게 되기를 원했을 리 없겠지만, 어쨌든 배후의 중심은 정의의 화신인 문재인 대통령이다. 일본과 우리는 선린(善隣)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전제가 있다. 그들의 반성과 사죄다. 현재 문 대통령 심중에 친일보다 반일의 자리가 더 크다면 아직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일 테다. ‘과거 친일’이 말끔히 사라져야 ‘미래 친일’의 자리가 비로소 마련된다.

선두 대선 주자가 문 대통령이던 2017년 당시 이미 일본 기자들은 두 나라 관계의 회복이 요원할 거라 짐작했다고 한다. 그가 청산하겠다고 공약한 적폐에 친일이 포함됐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다. 예감은 현실이 됐고 적폐 청산은 대통령의 정의일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수많은 모순들처럼 대통령의 충정도 겨냥한 과녁으로 곧바르게만 날아가는 건 아니다.

우선 역사를 바로잡겠다며 거꾸로 뒤틀어버리는 아이러니다. 반일의 명분은 매국노가 득세한 역사 아이러니의 광정(匡正)일 것이다. 그러나 민족 이전에 계급이 있었다. 조선 말엽 반일은 봉건 왕정을 지탱하는 수단 중 하나였다. 신분 사회의 착취ㆍ부조리를 지배 계급인 양반이 민족ㆍ애국을 강조하는 식으로 호도하려 했다는 게 반일 역사의 이면 진술이다. 친일파의 멸칭인 ‘토착왜구’도 실상은 구(舊)체제를 위협하던 계몽 세력이나 동학ㆍ천주교 신자들에게 기득권층이 붙인 딱지였다는 것이다.

정부가 윤색한 독립운동사(史)에는 이렇게 선악이 착종된 복잡한 입체 구조가 누락돼 있다. 왕을 충성의 대상으로, 동학 농민군을 진압해야 할 폭도로 여긴 안중근 지사의 양반 정체성은 가려지고 기록이 부실한 ‘국민 누나’ 유관순 열사가 유독 부각된다. 반일 감정 자극을 위한 불쏘시개로 스타를 활용하려는 대중영합적 심산이 정부에 전혀 없지 않을 것이다.

뭉치자는 구호가 분열을 부추기는 것도 아이러니다. 대통령이 믿고 있는 국민 통합의 구심은 민족인 듯하다. 그러나 어쩌면 통합은 기만적인 말이다. 자기 진영만 결집하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서로 분열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하며 자기 편 결속력을 강화하는 정치권의 최근 좌우ㆍ여야 다툼이 그 사실을 드러낸다. “일제가 민족을 갈라놓으려 사용한 수단이 빨갱이 낙인”이라는 문 대통령의 3ㆍ1절 주장은, 일제가 공산주의자를 탄압한 핵심 목적이 천황제라는 봉건 체제의 수호였다는 사실(史實)과 어긋나기도 하거니와,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로 인해 국민이 분열했다”는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주장과 결과적으로 효과가 같다. 깔끔한 좌우 분열이다.

통합이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통합ㆍ순수 같은 구심 계열 언어는 허구적이다. 실제 세계에서는 원심력이 강하고 그걸 거스르는 일이 옳지도 않다. 도저한 민족주의의 해악은 배척ㆍ고립이다. 단순화해 정서에 호소하면 반일은 혐일(嫌日)이 된다. 세계화의 반작용인지 울타리를 치고 누구건 타자이면 밀어내는 각박ㆍ몰연민에 세계가 침잠할 조짐이다. 추종해야 하는 시대정신이 아니다.

권경성 정치부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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