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전인 1959년 오늘(3월 28일), 중화인민공화국이 라사(Lhasa)의 달라이 라마 티베트 정부를 강제 해산했다.
원-청을 거쳐 근 1,000년 동안 중국의 직ㆍ간접 지배를 받으며 국가적 지위가 바뀌어왔지만, 티베트 불교의 종교적 구심력으로 지탱된 티베트 국가 및 민족의 정체성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 의지가 1912년 청-중화민국으로부터의 완전 독립 선언이었다. 그 국가가 50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점령됐다가 59년 3월 중국공산당 정규군과 티베트 게릴라의 이른바 ‘라사 교전’ 직후 해산된 거였다.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 4월 29일 ‘중앙 티베트 행정부(Central Tibetan Administration)’란 이름의 망명 정부를 수립했다.
타이완 중화민국조차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마오쩌둥 체제의 중국 공산당에 티베트 독립은 어불성설이었다. 게다가 봉건왕조나 다를 바 없는 티베트의 신정정치도 용인할 수 없었다. 51년 티베트 정부와 체결한 ‘17조 협의’의 골자는 티베트가 중국 영토라는 전제하에서 전통적 종교와 문화를 존중한다는 거였다. 하지만 중국의 일부인 한, 사원의 대토지 소유 등 봉건 지배질서까지 ‘자치’로 묵인할 수는 없었다. 그 갈등이 59년의 ‘라사 봉기’였다. 중국 정부가 청년 달라이 라마를 베이징 문화행사에 초청했는데, 공산당이 그를 인질로 삼으려 한다는 소문이 티베트의 독립ㆍ저항의식에 불을 지폈다.
미국 CIA 등이 제한적으로 지원했다고는 하지만 중남미 등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농부와 승려들의 게릴라 군대로 국공내전과 제국주의 전쟁으로 단련한 중국군에 대항한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했다. 항전은 나흘 만에 끝이 났다. 전투에서만 티베트인 수천 명이 숨졌고, 이후에도 ‘사회주의 개혁 완수’를 위한 숙청 작업이 이어졌다. 망명정부는 59년 봉기 희생자가 약 8만5,000여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또 그만큼의 티베트인이 봉기 직후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 등지로 망명했다. 약 13만명에 이르는 망명정부의 티베트 ‘국민’들은 역사의 가장 아픈 날들이 몰려 있는 이맘때면 세계의 중국대사관 앞에서 독립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인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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